1912년 백악관행을 따낸 최종 승자는 민주당의 우드로우 윌슨이었지만 미 국민의 기억 속에 각인된 그해 대선은 ‘테디 루즈벨트의 선거’였다.
윌리엄 맥킨리 대통령이 취임 6개월만에 암살당하면서 미 역사상 최연소인 42세에 26대 대통령직에 올랐던 루즈벨트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로 꼽힌다.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 그리고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러시모어산에 흉상으로 조각되어 있는 그는 강력한 대외정책으로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기업의 부패를 척결하는 과감한 국내정책으로 경제정의 실현의 초석을 닦으며 두 번의 임기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퇴임후 1년동안 해외여행을 떠났다 돌아 온 루즈벨트는 자신의 손으로 내세운 후임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의 국정이 영 못마땅했다. 특히 자신의 대표 과제였던 대기업들의 결탁 제재와 자연보호에 영 소극적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다시 한번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공화당내 반 기성 진보그룹의 기수를 자처한 루즈벨트의 인기는 현직 태프트를 능가했다. 경선의 실제 득표수도 50만표나 많았다. 그러나 아직 예선제도가 정착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당 지도부의 불공정한 대의원 수 배정으로 후보지명전은 태프트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당대회장을 박차고 뛰쳐나온 루즈벨트와 지지자들은 제3당을 창설했다.
황소사슴(Bull Moose)이란 애칭으로 불린 혁신당은 곧 공화당을 제치고 민주당과 양자대결의 선거전을 펼쳐갔다. 선풍적 인기를 모았으나 반대도 적지 않아 루즈벨트는 “3번 임기를 꿈꾸는 자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한 과격분자로부터 저격을 당하기도 했다. 안주머니에 넣었던 두툼한 연설문 덕에 심장관통을 모면한 그는 양복에 피가 배인 채로 연설을 강행했다 - “내 몸에 총알이 들어있어 긴 연설은 못하겠지만…황소사슴은 총 한방 정도론 절대 죽지 않아요” 결국 공화당과 표가 갈린데다 자신보다 한 발 더한 윌슨의 개혁주의에 밀려 패배했지만 그의 득표율 29%는 아직도 미 선거사상 제3당 후보가 세운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미국의 선거 캠페인은 참으로 흥미롭다. 한마당 축제 같은가하면 필사의 전쟁이고, 논리정연한 과학적 근거에 의한 정확한 예측을 감탄하려고 하는 순간 선거판을 뒤흔드는 이변들이 속출한다. 지난달 US뉴스&월드리포트지가 특집에서 지적했듯이 매 대선 캠페인은 ‘사회의 트렌드를 반영하며 당시 이슈를 알려주고 미국의 과거와 미래를 설명해주는’ 역할을 맡아왔다.
그래서 캠페인의 가장 강한 동력은 예외 없이 변화에 대한 국민의 갈망이었다. 새로운 텔레비전 시대를 맞아 젊고 잘생긴 ‘뉴프런티어’의 기수와 함께 이상적 꿈에 열광한 ‘케네디의 선거’가 그랬고 “당신은 4년 전보다 더 잘 살고 있습니까?”의 한 마디로 카터를 압도하며 불경기에 허덕이는 미 국민들에게 ‘햇빛 밝은 미국의 아침’을 약속한 ‘레이건의 선거’가 그랬다.
그리고 2008년 대선은 누가 뭐래도, 최종 승부와 관계없이 ‘오바마의 선거’다.
19일의 위스컨신과 하와이까지 불과 열흘 동안 10연승을 거둔 버락 오바마는 이제 민주당 후보 등극을 눈앞에 두고있다. 힐러리가 내달 텍사스와 오하이오 예선에서의 대역전을 다짐하고 있지만 대세는 돌이키기 힘들어 보인다. 오바마의 2월 완승이 힐러리 표밭을 성공적으로 잠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근로계층과 노년층, 여성과 히스패닉까지 상당수 오바마에게 마음을 빼앗겼는데 이들이 아니면 힐러리는 기댈 곳이 없다.
이번 민주당 경선처럼 숨가쁘게 변하며 휘몰아치는 캠페인을 본 기억이 없다. 짧게는 지난 몇 주였고 길게 잡아도 지난 몇 달 만에 판세가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매 주마다 예측이 빗나가는 ‘굴욕’에 고심해온 정치해설가들은 힐러리의 전략실패를 야박하게 지적해대지만 근본적 원인은 힐러리가 아닌 오바마에 있다.
변화에 대한 여론의 뜨거운 갈증을 동력으로 한 오바마 캠페인은 그저 하나의 캠페인을 넘어선지 오래다. 돌풍으로, 현상으로, 신드롬으로 확산된 지지열기엔 이제 개인숭배에 빠진 사교의 집단최면이라는 표현까지 붙여졌다. 그만큼 전통적 정치에서 보기 힘들었던 현상이라는 뜻이다.
힐러리에 비하면 오바마는 출발부터 미디어의 총아였다. ‘최초의 흑인대통령’에 대한 의무감에 더해 젊고 잘생기고 박력있는 이 웅변가의 매력에 전 미국인들과 함께 미디어도 빠져들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언더독에서 선두주자로 자리바꿈하면서 미디어의 어조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공허한 말뿐의 약속’이라고 힐러리와 매케인이 한 목소리로 공격하는 오바마의 실체에 대한 검증 요구다. CIA에 떠밀려 ‘피그만 침공’이라는 일생일대 외교실패에 직면했던 케네디도 14년 의회경력이 있었는데 3년전까지만 해도 주의원에 불과했던 오바마가 과연 통수권자가 될 수 있을까, 오바마 마법이 풀려버린 후에도 오바마 대통령, 오바마 행정부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변화의 공약을 실행할 수 있을까, 라고 묻기 시작한 것이다.
오바마도 힐러리가 아닌 매케인을 향한 조준을 시작했다. 앞으로 그의 메시지에는 보다 구체적 대안들이 담길 것이다. 그러나 대안에 상관없이 오바마를 선출하여 품격높은 사회로 업그레이드되려는 미국인들의 열망은 아직 강렬하다. 공화당원까지 편승하고 싶어하는 오바마 돌풍은 한참 더 계속될 것이다. 11월전에 오바마 마법은 풀릴 것인가에 대한 공화당의 기대도, 민주당의 우려도 지금으로선 ‘아니다’에 가깝다.
대선 캠페인의 순간순간들은 역사적 에피소드로 남아 ‘미국문화 변화의 흐름을 통찰하게 하는’ 좋은 단면이 되고 있다고 정치학자들은 말한다. ‘오바마의 선거’ - 2008 캠페인은 지금까지의 어느 캠페인 보다 미 역사에 굵은 획을 그으며 강한 자취를 남기게 될 것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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