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에서 객관적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를 ‘부정’(denial)이라고 부른다. 현실이 너무 괴로울 때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정신상태가 미성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목격된다. 프로이트의 딸이자 심리학자인 안나 프로이트는 약물 등 중독자들 사이에서 이런 경향을 발견하고 중독과 부정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부정’의 심리학은 그 후 가족의 죽음, 실직, 이혼 등 심한 괴로움에 직면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범위가 확대되는데 이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학자 중에 엘리자벳 커블러-로스라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1969년 ‘죽음과 사망’이란 책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가 겪는 고통의 다섯 단계를 묘사했다. 첫째는 부정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둘째는 분노로 왜 내가 그런 일을 당해야 하냐고 외치는 것. 셋째는 타협으로 조금만 더 살게 해달라는 것. 넷째는 절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다섯째는 수용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마지막을 정리하는 것이다.
죽음이든 중독이든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인간은 처음에는 이를 순순히 받아드리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자 등 주위 사람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부정에서 수용까지 가는 과정을 가능한 한 덜 고통스럽게 해주는 것이다.
집 값 하락도 아마 이에 못지않은 고통인 모양이다. LA 타임스에 따르면 작년 2월 남가주 6개 카운티 중간 주택가가 사상 최고인 50만 5,000달러를 기록한 이후 1년 사이 18%가 떨어져 1월 41만 5,000달러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1년 새 낙폭으로는 역사 상 최대다. 전국적으로도 작년 4/4분기 주택가는 전년에 비해 5.8% 떨어졌으며 같은 기간 가주 전역 중간가는 48만4,000달러에서 38만3,000달러로20%이상 떨어졌다.
그럼에도 주택 소유주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1,61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해리스사 여론 조사에 따르면 자기 집 값이 떨어졌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23%에 불과하며 41%는 그대로, 36%는 오히려 올랐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시세와 파는 사람의 생각이 다를 때 나타나는 현상이 판매량의 감소다. 지난 달 남가주 주택 판매량은 20년래 최저를 기록하면서 전년에 비해 40%나 줄어들었다. 셀러의 저항에도 불구, 주택가가 이처럼 내려간 것은 팔린 집의 1/4이 차압 매물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수년간 남가주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를 수 있었던 것은 소득도 크레딧도 묻지 않는 소위 ‘거짓말쟁이 론’을 통해 주택가의 100% 융자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붕괴와 함께 이런 론이 사라진 지금은 보통 직장을 가진 사람이 정상적인 융자를 받아 페이먼트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집값이 내리기 전에는 주택 시장의 정상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 정도가 되려면 집값은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할까. 지난 주 월스트릿 저널에 따르면 남가주 주택 값은 역사적으로 1인당 소득의 6~9배 사이를 오르내렸다. 그러던 것이 작년 피크였을 때는 13배가 넘었다. 지금 11배 수준으로 내려왔지만 아직도 30~40%가 더 내려가야 정상이다.
최근 메릴 린치는 올해 15%, 내년에 10% 추가 하락이 예상된다고 밝혔는데 이것이 맞다면 집값은 아직 한참 더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모든 전망이 그렇듯 집 값 역시 큰 폭으로 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지금 그 수준에 머문 채 소득이 점차 늘어나 역사적 평균에 근접할 수도 있다.
91년 중간가 18만 달러로 정점에 달했던 남가주 집값이 97년 15만 달러로 바닥을 치는데 6년이 걸렸다. 지난 수년간의 주택 호황은 그 때와 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바닥까지 갔다 반등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바닥이 언제인지를 점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 동안, 많이 떨어지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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