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1. 천단에 이르러
베이징, 그 곳에는 천단, 이름하여 Temple of Heaven이 있다. 천단, 그것은 그저 그 곳에 ‘있지’않고, 북경 사람들의 마음 한 복판을 빈틈 없이 꽉 채우고 들어 앉은 삶의 중심이요 정신의 중심으로 ‘실재’한다.
천단에는, 오랜 세월 선조들로부터 시작되어 세세대대로 대물림되어 온 북경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 긴 숨결과, 독특한 정신의 무늬가 그 어떤 조각품보다도 곱게 아로 새겨져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 짓게 한다.
천단 속을 바다 거북이처럼 느리게 걸으며 나는, 바야흐로 과일 속의 ‘씨앗’처럼 과거를 통해, 신생의 미래와 꿈을 향해 활짝 개화하고 있는 또 다른 베이징을 발견한다. 한 알의 과일이 작은 씨앗을 통해 과거를 흡수하고 현재를 견디어 찬란한 미래를 여물어 내듯, 천단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조화로운 혼효를 통해 베이징의 신생을 꿈꾼다.
원래 천단은, 1420년 일월성신과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명왕조 시기에 건축된 이래, 청명 양대 왕조의 제사터로 중국인들의 정신의 요람으로 존재해 왔다. 매년 동지점과 하지점에 황제를 비롯한 황족이하 문무대신들은 제궁에 모여 단식한 후, 동지와 하지의 첫 일출에 맞추어 원구단과 기년전에서 일월성신과 조상들에게 풍년을 빌며 제사를 올렸다.
(부끄럽지만, 어릴 적부터 부티와는 거리가 먼 비쩍 마른 멸치 같은 체형의 소유자임에도 하루 다섯끼의 식사량을 채우지 못한 날이면 당뇨 환자마냥 눈이 침침해지고,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손까지 벌벌 떠는 나로서는, 황제와 그의 신하들이 단체로 대대적인 단식전을 벌였다는 말을 듣고, ‘그래 왕노릇도 힘든 일이여, 왕이었던 적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해’, 속엣말하며 한숨지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하리)
2. 그곳에서 만나는 진짜 북경 사람들
천단은 이름 그대로 산자들이 아니라 죽은자들 즉, 하늘에 있는 이들을 위한 곳이다. 그럼에도 그곳은 황제가 살았다던 자금성에는 느끼지 못했던 삶의 생기로 차고 넘친다. 이상하지 않은가. 산자 중의 산자인 황제가 살아가던 곳에서조차 느낄 수 없었던 생의 온기를 죽은자를 위한 공간인 천단에서 느끼다니 말이다. 그렇지, 산송장이라는 말도 있지않던가. 어떤 이유로든 산자가 죽은자보다 더 생명력을 잃거나 생기가 고갈되는 수도 있을 터.
천단에는 선명한 생의 온기와 삶의 향기가 가득하다. 왜냐고 묻고 있는가. 그것은 말이다, 천단은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 커다란 품으로 북경 사람들 모두를 품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자금성이 버려져 잊혀지고 그리하여 생명이 다해버린 궁터라면, 천단은 온갖 북경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통같은, 그러나 결코 천박하지 않은 활력과 힘으로 넘쳐나는 삶의 터이다.
은퇴한 노인들은 그곳에 모여 시를 읊고 칠현금을 키며, 아줌마와 아저씨들은 국민체조를 하거나 나비처럼 훨훨 날아 배드민턴을 친다. 청년들이 모여 헙헙, 숨을 고르며 기공을 하는 곁에서 처녀들은 겹동백처럼 아름다운 원을 이루어 춤을 춘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들의 언니와 형과 부모와 조부모를 바라보며 자신의 아주 오랜 후의 미래에 대해 배운다. 머지않아 잘 자라난 아이들은 그곳에서 춤을 추거나 기공을 할 것이고, 그보다 더 나이가 들었을 때엔 한시를 읊거나 칠현금을 울릴 것이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천단이 들려주는 그들의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살아있는 것들에게서는, 폐허의 적요로움을이 아닌 조화로운 자연의 섭리에 따른 평화를 느낄 수 있듯, 천단은 자신을 찾는 진짜 북경 사람들에게 올림픽이 불러 온 천박한 개방의 물결 속에서도 절대 좌초하지 않고,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저 멀리, 앞을 바라보고 나아갈 힘을 준다. 그래서, 천단 속의 북경 사람들은 모두 아이처럼 명랑하고, 농부처럼 소박하고, 귀족처럼 우아해 보인다.
정석Ⅱ나 토플책처럼 낡고, 무겁고, 상식적이기만 한 나는, 다른 곳에서 이미 보아버린 베이징과 너무도 다른 얼굴을 지닌 이 천단 속의 베이징이 너무 뜬금없고, 기이하고, 비현실적이고, 또 아름다워서 거의 믿을 수가 없었고, 그럼에도 인간의 삶의 결이란 결코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졸렬하고, 얄팍한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천단 은 그렇게 베이징의 한 복판에 조용히 서서, 제 아이에게 생의 에너지와 정신의 생기를 충전해주고, 명징한 자의식을 일깨워 주는 지혜로운 어미처럼 북경 사람들을 포근하게 품고 있었다.
3. 우리의 ‘천단’은 어디인가
지난 일요일, 숭례문이 전소했다는 황당한 소식 앞에, 최수철의 소설 속 한 구절이 자꾸만 떠올랐다. 바로, ‘나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라는 문장. 그렇다, 우리는 우리를 과연 용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가. 오호 통재라, 숭례문의 국보 1호로서의 적합성 문제 같은 것은 잠시 뒤로 미루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우리의 정신을 추스르고, 생의 원기를 북돋우고, 생활의 힘을 재충전할 것인가.
경비원 한사람이나 제대로 된 경비 시스템조차 없이, 체면 치례로 빨간 소화기 여섯개 달랑 가져다 놓은 채, 외면하고 있던 숭례문에 대고 우리는 과연 어떻게 생기와 힘과 에너지와 자의식을 가르쳐달라고 소리친단 말인가. 우리는 그렇게도 뻔뻔한 족속들이란 말인가.
숭례문 전소에 대한 원인 분석과 대안 마련보다 책임공방에 열중하는 정치인들과 고위 공직자들은 천단과 북경 사람들로부터 꼭 배워야 하리. 우공이 산을 옮기듯 끈기있게 우리의 현재 속에 과거를 영입하고 그 속에서 진주처럼 반짝이는 미래를 발굴해내는 현명함과, 그것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지하게 정성들여 가꾸어 나가는 법을 우리는 배우고 생활화해야 하리.
오늘은 천단이 키운 북경 사람들과, 또한 북경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천단을 두루 생각하며, 과연 우리에게는 그 ‘과거’ 혹은 ‘역사’를 지킬만한 아무런 힘도, 지혜도, 의지도 없는 것인가고, 자꾸만 되묻는 하루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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