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의 흰 산이 콩고르디아 빙하에서 본 K2(8,201m)의 위용. 삼각형을 이룬 K2는 에베레스트보다 오르기 힘든 산으로 산악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콩고르디아로 가는 빙하엔 하얀 빙탑이 도열하듯 서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처럼 한 걸음씩 빙하를 기어오르고 있다.
준령 병풍거느린 ‘하늘의 군주’ K2봉
빙하길 막은 ‘직삼각형’ 위용
‘고로’부터는 빙하에서 잠자
해발 4,650m 콩고르디아 빙하
거대한 넓이와 높이에 충격이
제법 높은 빙하 봉우리에 올라섰는데 맞은편 멀리에서 사람이 걸어오고 있다. 길이 끝난 곳에서 돌아오는 것일 게다. 문득 길이란 무엇인가 생각 든다. 첨단 테크놀로지의 집합인 비행기를 타고 하늘 길을 이어 파키스탄으로 왔다면, 고대 문명 이동로 실크로드의 변형인 KKH 하이웨이로 스카루드까지 왔다. 그 다음부터는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길을, 절벽에 매달린 채로 타고 넘어 마지막 마을 아스꼴리로 왔다. 거기서 길은 끝났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길이 끝난 곳에서부터 다시 빙하 길이 이어지고 있다. 저기 오는 사람은 빙하 길, 끝까지 갔다 오는 걸까? 끝이라… 그게 있긴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까이 온 그 사람이 반가운 인사를 한다. 설악산 산양 지킴이로 잘 알려진 환경운동가 박그림씨였는데 역시 그 답다.
“쓸데없는 예산을 편성해 설악산 등산로를 나무 테크로 만든다는 겁니다. 그게 설악산 망치는 일이잖아요. 등산객 편의를 위한 일이라지만 사람이 몰리면 자연은 더 훼손되지요. 설악산 산양은 어쩝니까? 하도 속을 썩이고 있으니까 마누라가 이 곳이나 갔다 오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한동안 설악산에 대하여, 야성의 산을 만든다고 문명을 대입시키는 행위에 대하여 말을 나눴다. 박그림씨와 함께 트레킹을 한 팀원들이 속속 내려왔다. 지인들이 많았다. 손재식 사진작가, 산 그림에 흠뻑 빠진 화가 김미리씨.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지 않으면 사는 의미를 모른다는 이재식씨. 빙하 끝에 있는 곤도고라(5,900m) 패스로 넘으려 했는데 거대한 크레바스가 생겨 못 간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고로’부터는 빙하에서 잠을 자야 했다. 여태 빙하와 만나는 산자락에서 막영을 했지만 여기부터는 그나마 산자락도 없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산사태 우려 때문에, 있어도 못 잔다. 우리는 편편한 돌을 깔고 텐트를 쳤다. 그래도 밑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장난이 아니다. 그러나 적응해야 한다. 앞으로 똑같은 잠자리가 계속될 터이니까.
아침엔 안개가 자욱했다. 어디선가 꺽꺽- 당나귀가 울었다. 엊저녁 무심코 짐을 내리는 당나귀 등뼈에 난 상흔을 보았다. 다시 짐을 질 시간이 온 게 두려워 울었을까. 빙하를 만든 건 물이지만 빙하를 깎아내는 것도 물이다. 물은 빙하를 뚫고 폭포도 만들고 강도 만든다.
황량함과 쓸쓸함으로 가득 찬 이곳은 묘한 매력이 있다. 지구 밖으로 행군해 나간 것처럼 암호로 가득 찬 길. 애써 그 암호를 풀려고 노력하기보다, 포터들이 행하는 방법이 더 쉬울 수 있다. 신 새벽 ‘아잔’에 맞춰, 빙하에 엎드려 그들의 하느님에게 올리는 무슬림의 경건한 하심(下心). 신의 뜻대로 하소서. 황량한 풍경과 두려운 자연 속에 그들이 의지할 곳은 신의 품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선지자들은 무수한 길을 떠돌며 그들의 신과 교감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신념이 있을 리 없다. 그저 걷기가 힘들어, 그 힘듦을 잊으려 길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본 것일 뿐이니까.
콩고르디아로 가는 빙하엔 하얀 빙탑이 도열하듯 서있다. 빙하 길은 한결 쉬워졌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은 역시 옳다. 무식하게 걷는 다리가 빙하 상단에 이르게 했으니까. 날이 개이며 브로드피크의 우람한 모습이 눈에 든다. 가셔브룸 빛나는 벽 오른쪽으로 바늘 끝처럼 뾰족한 봉우리들이 나타난다. 가셔브룸 2봉일 것이다.
이제 해발 4,500m를 넘어서고 있다. 사방을 지웠던 운무가 개인 덕분일까. 빙하 끝에 무지개가 뜬다. 이토록 선명하고, 거대한 무지개는 처음이다. 하얀 산을 배경으로, 광활한 빙하 끝에 그어진 반원의 무지개. 전율이 이는 아름다움이다.
드디어 도착한 콩고르디아는 해발 4,650m였다. 이 동네를 맨 먼저 진출한 영국 탐험가 마틴 콘웨이가 파리 광장이름을 따 콩고르디아로 불렀다. 1892년 일이었는데 그 이름을 붙인 건, 크기를 실감나게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작은 땅덩어리를 여러 나라로 쪼개 쓰는 유럽인답게 표현의 통이 작다.
콩고르디아 빙하는 프랑스 광장 콩고르디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우선 이곳은 빙하들의 집합처다. 발토르 연장선상에 있는 ‘어퍼 발토르’와 K2로 연결되는 ‘고드윈 오스틴’ 빙하. 그 외 브로드피크가 흘려준 빙하와 가셔브룸 4봉이 내려주는 빙하. 그리고 우리가 거슬러 온 발토르까지 5개가 만난다. 한 개의 빙하 횡단만 해도 가늠할 수 없는 넓이인데 다섯 개라니. 그러므로 콩고르디아는 구경이 큰 어안렌즈로도 다 볼 수 없는 큰 넓이를 가지고 있다. 4,600m 높이라 당연히 공기는 희박하고 맑다. 따라서 아득하게 먼 곳까지 가시거리가 연장된다. 눈 밝은 이는 브로드피크의 베이스캠프 형형색색의 텐트도 볼 수 있고, K2 베이스캠프 일부도 발견해 낼 수 있다.
누구나 콩고르디아에 도착하면 한동안 자리에 주저앉게 된다. 힘겨워 그럴 수도 있지만 시야를 압도하는 충격 때문이다. 수평의 넓이에 수직의 높이가 보태진 아득한 세계. 왼쪽으로 여태 보이지 않던 ‘하늘의 군주’ K2가 뿌리째 나타난다. 발토르 빙하가 Y자로 갈라지며 왼쪽으로 이어지는 고드윈 오스틴 빙하 끝을 막아선 직삼각형의 K2봉. K2로 하여 빙하는 막을 내린다. 여태, 모레인의 미로 속에서도 정면에서 시선을 붙잡았던 가셔브룸 4봉. 등대역할을 했던 그 빛나는 벽이 갑자기 왜소해지는 느낌. K2는 극적인 순간을 노려 반전이 시작되는 영화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우리도 한동안 바위에 앉아 그 아득한 산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직삼각형 날카로운 창끝으로 군청색 하늘을 사정없이 찌르고 있는 K2는 비현실적이다. 빙하 위로 뿌리째 드러난 산은 모든 주변을 압도한다. K2는 홀로 고고하다. 하늘의 절대 군주를 알현하는 건 사람뿐이 아니다. 여태 보아오며 감탄을 마지않았던 산들은, 모두 K2가 거느린 문무백관이었다. 브로드피크, 가셔브롬 4·5봉, 그 넘어 바늘 끝으로 보이는 2봉. 발토르킹그리, 스노돔, 시야킹그리, 초골리사, 미터피크, 파유, 올리비아호, 무스타크 타워, 트랑고타워, 커시들러, 엔젤피크… 이 산들은 K2를 보여주기 위한 예고편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산들은 품에 빙하 하나씩 키우고 있다. 그 하얀 빙하는 K2에 대한 예의였다. 왕을 알현하기 위하여 차려입은 하얀 드레스였다. 누가 말했던가. 이곳에 이르는 웅장한 길은 세계 최고의 트레킹 코스라고. 콩고르디아까지 이르는 길은 최악이었으나 그 보상은 최고였다.
우리는 예정대로 K2 베이스캠프를 올랐고 곤도고로 패스를 넘어 다시 사람 사는 마을로 내려왔고 꼬박 한 달의 여정을 접었다.
신영철
(소설가·재미한인산악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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