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미 대선은 출발부터 유권자들에겐 쉬운 선거가 아니었다. 각당 경선의 날자는 다가오는데 지지후보 선택의 고민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고민의 이유는 달랐다. 공화당 유권자들은 “뽑을 후보가 없어서” 기권하고 싶었고 민주당 유권자들은 “뽑아야 할 후보가 많아서” 투표 당일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선거에선 좋은 후보 고르기보다 싫은 후보 솎아내기가 훨씬 효율적인 듯싶다. 5일 수퍼화요일을 지나며 공화당 유권자들도 존 매케인에게 조기 승리를 안겨주었다. 나이는 많지만 누구처럼 말 바꾸기도 안하고, 누구처럼 극단적도 아니고, 부시행정부가 남긴 국론 분열의 상처를 초당적 화합으로 봉합해 갈 무난한 적임자로 택한 것이다.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오리무중에 던져진 것은 민주당 경선이다. ‘힐러리 대세론’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엊그제까지 뜨겁게 몰아치던 ‘오바마 돌풍’도 압승을 몰아주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다. 6월 마지막 예선까지가 아니라 8월 전당대회까지 끌고 갈 장기전이 예고되었다. 그것도 오바마 바람과 힐러리 저력으로 승패를 주고받던 이제까지의 ‘기 싸움’에 대의원 확보경쟁이 더해질테니 앞으론 전세 판독조차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CNN이 실시한 민주당 유권자 대상 출구조사의 한 결과가 흥미롭다. “힐러리가 후보가 된대도 난 좋아요”라는 답변이 72%인데 “오바마 후보에 대만족입니다”라는 답변 역시 71%에 달했다. 아직도 민주당 유권자들은 두 후보 다 썩 괜찮아서 마음 정하기가 난감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투표를 하기위해 5일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두 후보가 그날 밤 행한 스피치는 지지자들의 마음을 또한번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힐러리가 “여성의 투표권이 허용되기 전에 태어났지만 오늘 당신의 딸이 이 자리에 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나의 어머니”라고 88세 노모를 소개했을 때 오랫동안 계속된 열광적 환호와 박수갈채에 담긴 감격을 공유하지 않을 여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일리노이의 한구석에서 시작된 작은 소리에서 이제 아무도 막지못할 거대한 함성으로 솟아오른 변화의 물결은 “이 나라를 치료하고 세계를 고쳐가고 이 시대를 다르게 만들 대합창으로 미 전국에 울려퍼질 것”이라며 자신의 캠페인은 이번 선거를 넘어 사회를 바꿔가는 흐름, ‘하나의 무브먼트’라고 선언하는 오바마의 역사만들기에 동참하고 싶지 않을 청년이 얼마나 되겠는가.
22개주의 투표결과가 전해지면서 30분마다 양진영의 희비가 엇갈린 5일은 민주당 유권자들에겐 글자 그대로 ‘익사이팅한 밤’이었다. 그러나 만사가 그렇듯 선거에도 양면은 있기 마련이다. 수퍼화요일은, 뉴욕타임스의 표현에 따르면,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대신 민주와 공화 양당의 갈 길을 갈랐다. 공화당은 초기의 분열을 마무리하고 확정된 후보를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할 새 계기를 마련했으나 민주당은 당내 분열이 우려되는 자칫 소모전으로 접어들 위험에 처한 것이다.
장기전이 되더라도 지난번 코닥극장에서의 공개토론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한다면야 계속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민주당에 플러스 효과를 줄 것이다. 그러나 박빙의 접전이 계속되면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 상대를 헐뜯는 네거티브 캠페인이다.
게다가 두 후보간 정책의 차이가 미미한 이번 경선은 이른바 아이덴티티(정체성) 정치의 표본이다. 지금까지 표를 결정한 절대적 요소가 인종과 성별, 연령과 계급 등 유권자 자신의 아이덴티티였다. 청년과 흑인과 남성과 고학력·고소득층은 오바마에 몰표를 주고, 여성과 히스패닉과 중·노년과 저학력·저소득층은 힐러리에 몰표를 주고 있다. 아이덴티티의 대결앞에선 명사들의 지지선언도, 클린턴 대물림 비판도 별 힘이 없다는 것이 이번 선거로 확인되었다.
속이 타는 것은 민주당 지도부다. 눈앞에 다가온 백악관 탈환이 어이없이 무너질까 걱정이 태산이다. 인기절정 두 후보의 과열된 경선에 자칫 공화당이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사의 각축전은 당장 이번 주말부터 이어진다. 약600명 대의원이 걸린 2월의 4차례 경선에선 오바마가 우세하지만 ‘미니 수퍼화요일’이라는 3월4일 경선의 전망은 또 달라진다. 자동차노조가 강한 오하이오와 히스패닉 유권자가 많은 텍사스에선 아무래도 힐러리가 유리해 보이니까…이렇게 전세는 일희일비를 거듭하며 전당대회까지 이어지다가 급기야는 민주당 지도부와 당직자들로 구성되는 수퍼대의원 쟁탈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당직자들의 지지표명도 고민이다. 대부분 초기부터 ‘힐러리 대세론’에 동참해온 당직자들 중 오바마 바람에 속마음이 기운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제각기 이유는 다르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본선에서의 경쟁력이다. 매케인이 공화후보로 확정되면서 더욱 그렇다. 40대 젊은 리더와 70대 노인 후보의 대비, 그리고 매케인의 가장 큰 무기인 무소속 유권자 확보를 능가할 후보는 힐러리가 아닌 오바마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역풍이 있을 것이다. 히스패닉과 노년층 표의 이탈도 우려되고 미국인의 본능적 인종차별에 대한 확신도 아직은 없다.
이래저래 민주당, 갈 길은 아직 멀고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박 록
주 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