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첫 한 달이 지나고 어느새 2월이다.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는 설렘으로 고조되었던 심신의 흥분이 한달은 지속될 만도 한데 그 사이 가라앉아 일상이 차분해졌다. 차분해진 정도가 아니라 “연초에 왜 이렇게 우울할까?”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새 출발의 달, 그래서 희망의 달인 1월이 사실은 우울한 달이라는 주장이 있다. 1월 중에서도 마지막에서 두 번째 월요일은 연중 가장 우울한 날이라는 이론이다. 올해는 그날이 1월21일이었다. 일명 ‘우울한 월요일’(Blue Monday)은 영국의 카디프 대학 심리학자인 클리프 아날 박사의 ‘발명품’이다.
1월이 흘러가면서 연말연시의 즐거웠던 기억은 희미해지고, 새해 결심은 이번에도 또 흐지부지 돼 찜찜한데, 크리스마스 때 신나게 썼던 크레딧카드 청구서는 날아들고, 수입은 빤하니 빚이 쌓일 게 분명하고, 게다가 날씨까지 우중충하니(남가주에도 얼마나 비가 억수로 왔던가) 기분이 점점 내리막길을 향하다가 ‘우울한 월요일’에 바닥을 친다는 것이다.
아날 박사는 날씨, 빚, 월급, 크리스마스 이후 며칠, 새해결심 실패한 지 며칠 등을 변수로 방정식을 만들어 그날그날의 우울한 정도를 계산했다. 말하자면 연말연시의 들뜬 기분이 현실과 부딪치면서 얼마나 급속히 가라앉는 가를 계산하는 셈인 데 비판이 없지 않다.
저마다 제각각인 사람들의 상황과 감정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비판이다. 그렇다고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월에 장례식이 많은 것이 비슷한 맥락이다. 벅적벅적 즐겁던 연말연시가 지나고 나면 노인들이 갑자기 허탈해져서 살려는 의욕의 끈을 놓고 마는 경향이 있다.
‘새해’라는 시간의 새 무대가 줄 수 있는 자극효과는 대단히 짧다. ‘새해’에 너무 기대를 걸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무대장치를 바꾸어도 등장인물이 그대로이면 달라질 게 별로 없다는 말이 된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등장인물, 사람들이다.
올해부터 또 다른 의미에서 무대장치가 바뀐 선배가 있다. 공간의 새 무대이다. 주류사회 전문직 종사자로 일하다 은퇴한 대학 선배이다. 출퇴근 부담에서 벗어나 새처럼 자유로운 데다 은퇴연금이 넉넉해서 평생 가장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그 선배에게도 아쉬운 게 있었다. 사람이었다.
“시간은 많은데 만날 친구가 별로 없어요. 일하며 살림하느라 직장과 집만 오갔더니 직장동료 빼고는 자주 만난 사람이 없는 거예요. 옛 친구들을 만나 봐도 너무 오랜만에 만나니 할 말이 없더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친구들을 좀 사귀어 두는 건데 그랬어요”
이 선배는 자상한 남편에, 엄마를 알뜰살뜰 챙기는 아이들이 있으니 문제가 없겠지만, 은퇴 후 곁에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경우가 너무 많다. 현직에 있을 때 아무리 인맥이 넓어도 일로 맺어진 대인관계들은 일을 떠나는 순간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고식(孤食)이라는 말이 있다. ‘혼자 밥 먹는다’는 의미이다. 평균수명은 길어지고, 이혼율은 높아져 노년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고식 인구가 증가하는 것이 사회적 추세라고 한다. 밥을 같이 먹을 친구도 없는 외로운 사람들이다.
우리는 삶의 단계 단계마다 받는 성적표가 있다. 학생 때 받는 시험 성적표를 시작으로, 진학한 대학을 보면 학력 성적표가 나오고, 취직한 직장과 승진에 따라 업무능력 성적표가 나오며, 자녀들이 얼마나 잘 자랐는지에 따라 자식농사 성적표가 나온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나오는 성적표는 ‘마음 농사’의 성적표인 것 같다. 삶의 여정에서 꾸준히 짜나간 관계의 농사이다. 자녀들 키우고, 일하느라 바쁠 때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삶이 한가해진 후, 생의 말년에 드러나는 성적표이다. 특히 장례식장에 가보면 고인의 살아생전 ‘농사’ 성적표가 보인다. 조문객이 넘쳐 잔칫집 같은 장례식도 있고 휑하니 쓸쓸해서 가슴이 아픈 장례식도 있다.
은퇴 준비는 빠를수록 좋다고 한다. 은퇴연금을 빨리 드는 것도 필요하지만, 은퇴 후 긴 세월을 같이 지낼 길동무들을 만드는 일이 더 먼저일 것이다. 채소가 농부의 발짝 소리로 자라듯 친구는 수시로 찾고 살피는 마음의 발짝 소리로 만들어진다. 새해결심을 못 지켜 실망한 친구, 카드빚이 쌓여 고민인 친구 - 그들의 마음부터 찾아가 보자.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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