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의 뉴페이스인 그는 연단에서 힘차게 외쳤다. “힘을 합하면 우리는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복지를 확대하고 헬스케어를 개선하며 환경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진보와 보수의 요구를 함께 수용하여 ‘분열’이 아닌 ‘화합’의 리더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초당적 합의를 호소하며 “함께, 우린 할 수 있습니다(Together, We Can)”라고 연설을 마친 그에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는 지금 전국의 표밭에서 “네, 우린 할 수 있습니다(Yes, We Can)”란 구호와 함께 젊은 유권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으며 변화의 바람을 몰고 있는 버락 오바마가 아니다.
그는 조지 W. 부시였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7년전 첫 의회 연설에서 협조와 쇄신을 역설했던 그는 지금의 오바마 못지않은 ‘변화’의 기수였다. 인종화합과 빈민층 끌어안기에 성공한 텍사스 주지사 출신의 그는 온정적 보수주의를 강조하며 ‘다른 종류의 공화당원’으로 자처한 새로운 얼굴이었다. ‘인간미 넘치는’ 아웃사이더인 새 대통령에게 미국민들은 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기대를 걸었다.
사흘 전인 28일 마지막 국정연설을 행한 부시 대통령의 입지는 너무나 달라졌다. 초라할(?) 지경이었다. 이날 낮 백악관은 TV 네트워크 앵커들을 오찬에 초청했다. 대통령 국정연설 홍보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날 이브닝 뉴스의 첫 보도는 케네디 일가의 오바마 지지 선언이었고 연설 중계 중간에도 관심을 모은 ‘뉴스’는 힐러리의 악수제의를 짐짓 외면한 오바마의 냉대였으며 중계가 끝나자 TV 카메라는 기다렸다는 듯 플로리다로 달려갔다.
레임덕 대통령의 지루한 스피치를 전하기엔 경선 캠페인의 열기가 너무나 뜨거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 사람도, 남은 1년의 국정 플랜을 듣고 싶은 사람도, 이젠 거의 없어진 것이다. 그에게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이미 국민들은 그의 어깨너머로 후임자를 찾느라 열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실패한 전쟁과 파당적 분열로 대변되는 ‘망가진 7년’을 말해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클린턴 퇴임후 부시가 택한 행정의 가이드라인은 당시 정가에서 ABC로 통했다. Anything But Clinton, 클린턴만 아니면 무엇이든 괜찮다는 뜻이다. 지금 뜨겁게 달아오른 유세현장의 분위기도 비슷할 것이다. 글자 하나만 바뀐 ABB, 물론 부시만 아니면 무엇이든(Anything But Bush) 이다. 특히 민주당 후보들에겐 모든 문제의 탓으로 마음 놓고 비난 할 수 있는 만만한 공격의 표적으로 더 없이 안성맞춤이다.
공화당 후보들에게 ‘부시’는 기피단어 제1호다. 정면 공격 역시 금기다. “워싱턴은 망가졌다. 내가 고칠 것이다”라고 아웃사이더 미트 롬니는 마음껏 기성정계를 공격하지만 그 망가진 7년의 리더를 흠집 내는 것은 삼간다. 전국적 지지도는 32%로 영 인기 없는 대통령이지만 공화당 내 부시의 지지도는 아직 73%로 건재하다. 최근 경기침체가 우려되면서 인기를 되찾는 감세정책, 안정을 보이는 이라크의 조기철군 반대, 낙태와 동성애 반대 등 공화당 후보들의 대부분 공약이 부시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공화당 후보들의 부시에 대한 요구는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제발 11월까지는 있어도 안보이게 투명인간이 되어주세요!”
이런 기류를 읽은 탓일까. 부시의 마지막 국정연설은 맥이 빠져 버린듯 평범하고 밋밋했다. ‘악의 축’이나 ‘무법정권’등의 극단적 표현을 마다않으며 선전포고를 방불케했던 예년의 국정연설과는 많이 달랐다. 레임덕의 한계가 있으니 새로운 과제는 차치한다 해도 ‘마지막’에 대한 감상이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부시대통령 시대의 유산’에 대한 언급조차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부시는 운이 없는 대통령이다. 워싱턴포스트가 이렇게 지적한다. ‘경제가 호황일 땐 이라크전쟁 때문에 좋은 평가를 못 받았고 이제 이라크가 안정을 찾아가니 경기침체 때문에 또 정당한 평가를 못 받게 될 것이다…’
28일 아침 대선취재 기자들에게 오바마 대변인이 보낸 이메일이 날아왔다. “앞으로 1년 후엔 버락 오바마가 의회에서 대통령으로서 그의 첫 연설을 행할 것입니다…”
부시의 ABC 방침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낸 것이 불과 7년 전인데 클린턴 일가의 백악관 재입성을 확신하는 사람은 지금 또 얼마나 많아졌는가.
지난 연말 매케인 캠페인이 아직 바닥을 치고 있을 때 뉴욕타임스의 저명 칼럼니스트였던 윌리엄 사파이어는 2009년 연초를 이렇게 예언했다 “매케인 대통령이 중도적 민주당 의회와 합의점을 모색하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8개월 큰 돌발 변수만 없다면 이 세 가지 전망 중 하나는 현실화 될 것이다. 그리고 세 명 중 한명은 5년 후(운이 좋다면 9년 후) 마지막 국정연설을 하게 될 것이다. 연설마저 레임덕이 되어버린 오늘의 부시가 그들 모두에게 엄숙한 교훈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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