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성에서 찾은 보물은 무엇이었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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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 소리없이 부복한 자금성을 보라
사람들로 바글대는 장안 대로 변, 옆집 아저씨처럼 후덕해 보이는 미소를 짓는 마오 쩌둥의 대형 초상화를 달고 납작하게 엎드린 자금성 앞에 처음 섰을때 나는, 때이른 봄바람에 분분히 낙화한 꽃잎을 볼 때처럼 이유없는 회한에 젖었다.
무엇이든 날려버릴 기세로 드세게 불어대는 바람 속에 서서 나는, 흐읍, 다시 한 번 숨을 고르고, 이 황금의 성 속에서 절대로 서두르지 말 것을 다짐하며 자금성, 그 또 다른 영겁의 세계 속으로 총총히 걸어 들어갔다.
만조의 문무백관들이 번쩍이는 보석의 홀을 양손으로 받쳐들고, 백발 성성한 머리를 조아려 지나던 그 길의 도저함은 사라졌으나, 수 만결의 무늬로 남은 그들의 숨결은 아직도 아흔 아홉 척 해자를 떠도는 듯 가슴 속에 사무쳐 왔다.
쩡, 소리내며 갈라질 듯 차가운 대기 속으로 불어 오는 북국의 바람은 하얀 햇빛을 먼저 지우며 자금성의 너른 마당을 조용히 지났다. 자객과 방화를 걱정하여 키 작은 소나무 한 그루 심어놓지 않은 이곳에서 청죽 우는 소리가 날리 무관할진대, 바람이 자금성의 돌바닥을 핥고 지날 때마다 싸리비 끄는 소리인듯, 청죽숲 우는 소리인듯 솨아아, 밀려드는 소리에 나는 이유도 없이 약간 서러워졌다.
어디를 가든 쉽게 발견하고 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사유(私有)의 풍경들이 꼭 있다. 여행객에게는 여행지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사유와 사색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무정한 돌멩이 하나, 못생긴 나무 한 그루, 심지어 녹초가 낀 더러운 하천, 그 모든 것이 깊은 사유와 사색을 불러온다.
대학 새내기 시절, 서울 생활을 막 시작한 우리들. 미치도록 부시고, 환장하도록 밝고, 오히려 슬프도록 화려하던 봄날의 오후마다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강의를 곶감 빼먹듯 날름날름 빼먹은 채 흑석동에서 사당동으로 넘어가는 그 좁고 비루한 언덕길을 무작정 걸었던가 말이다.
지천에 널부러진 촌스러운 들꽃 무더기, 잘 자란 나무 한 그루조차 없어 눈물 나도록 황량하고, 가슴 사무치도록 쓸쓸하던 그 길을 무작정 걸으며 바라보던 그 풍경들을 나는 생각했다. 20년이 지나, 낮고 부드러운 지붕들과, 좁고 누추한 길들과, 드문 드문 불탄 판자집이 검은 구멍처럼 아프게 드러난 초라한 산동네의 풍경을 따라 걸으며 수줍게 도달하였던 사유의 골짜기를 나는, 이곳 황금의 성에서 다시 대면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에 똥개처럼 푸르르, 몸서리를 쳤다.
한 걸음, 그리고 한 걸음. 시즌이 지나 한산한 황금의 성 속으로 몸을 쑤욱 드밀자, 오호라, 차츰 가까워질수록 더욱 감동적이고, 그 속으로 용해되어 갈수록 더욱 경이로운 자금성이 내 눈 앞에 우뚝 서있었다.
2. 안델센의 ‘황금의 성’
역사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이란 언제나 손님일 뿐이듯, 이 황금의 성 속을 걸어다니는 무수한 사람들 또한 모두 낯선 손님들일 뿐이다. 모든 손님들이 항상 그러하듯, 예서제서 드문드문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황금의 성 안에서 약간 불편해 보인다.
막막한 만주 벌판에 선 듯, 심하게 넓기만 할 뿐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 한 그루 없는 이곳은 무척 황량할 뿐 아니라, 또한 불편하다. 그 흔한 공중 화장실을 찾으려해도 수 백미터를 걸어야 한다는 데야. (잠시 화장실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의 공중 화장실에는 별을 붙여 등급을 표시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마치 호텔처럼. 쓰리-스타 화장실, 포-스타 화장실, 이렇게 말이다. 만약,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양변기가 아니면 볼일을 볼 수 없는 당신이라면 꼭, 필히, 반드시, 당신은 ‘포-스타’ 화장실을 찾아 내어 그 곳에 가야하리. 그리고, 꼭, 휴대용 화장지를 ‘휴대’해야 하리. 그곳엔 휴지가 없으므로, 만약 휴지를 ‘휴대’하지 않으면 이국만리 타향 땅에서 아주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음을 또한 명심해야 하리.)
안델센은 어릴 적 그런 꿈을 꾸었단다. 저 멀리 중국이라는 아름다운 나라에 있다는 황금의 성에서 황제를 위한 음악가가 되어 그 붉고 작은 입을 쫙쫙 벌려 꾀꼬리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그리하여 바야흐로 황제의 사랑을 받는 꿈 말이다. 그의 동화 속에서 금을 캐어내듯 누군가가 호모 섹슈얼리티 컨텐츠를 캐어 내었다한들, 뭐 어떠리. 그저, 아이다운 꿈, 혹은 천재적인 작가의 상상력 정도로 생각하면 될 터. 세상은 변해, 안델센이 그려마지 않던 황금의 성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천재적인 상상력이라든가 리비도의 재현이라는 꿈이 아니라, 비행기표와 무급 휴가로 바뀐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재난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어쨋든 안델센 같이 어린 아이다운 꿈도 꾸지 못한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상력 또한 적당히 고갈된 중년의 여인에게 황금의 성, 자금성은 한층 불가해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3. 옛날엔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네
이곳, 자금성의 풍경 속에는 인간적인 것이 티끌만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염집 담장처럼 아담한 덕수궁의 돌담길에 담뿍 배어있던 따스함이라든가, 버선코를 닮은 경복궁의 유려한 처마끝에 조롱조롱 메달린 복스러움을 자금성에서 기대한다면, 실망하리라.
너무 크고 도도해서 위압적이고, 너무 아름다워서 지극히 비인간적이며, 또한 너무 당당해서 보는 이의 기를 한 없이 죽이는 자금성. 아마 자금성 같은 여인을 애인으로 둔다면, 감히 그녀를 떠나가기도, 또한 그곁에 머물기도, 죽도록 어려우리라.
나는 자금성의 위세에 눌려 관광은 잠시 접어둔 채 어느 외진 계단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수 세기 동안 한 자리를 지켜 온 회색의 돌 계단에 촌개처럼 퍼질러 앉아 힘이 솟을 때가지 해바라기를 했다.
그리고, 그 때 발견한 그곳, 저 멀리 그 한 귀퉁이에 홀로 서 있는 작고 아담한 집, 커피와 찐빵과 온갖 잡동사니를 파는 그곳을 발견한 나는 슬픔에 와르르 무너졌다.
그 옛날 황태자가 왕도를 익히고 치국과 평천하를 논하던 경연의 장이었던 그곳. 그곳은 이제, 시시껄렁한 먹거리와 조잡한 기념품으로 이국의 관광객을 후리는 기념품 가게로 변모해 있었다. 이를 두고 ‘전락’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일러 감히 ‘전락’이라 명명할 수 있으리. 아편 전쟁과 청일 전쟁의 화마 속에서 자금성의 찬란함이 서서히 사라지고, 왕조의 몰락 속에서 수 천의 환관들이 제 배를 불리려 밤낮으로 성의 벽과 물동이에서 금박을 벗겨갔다지만, 그것은 오히려 이 ‘전락’에 비한다면 속된 말로 ‘세발의 피’ 정도에 지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황금의 성은 금박이 벗겨져 더이상 황금의 성이라 불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의 ‘전락’으로 인해 더 이상 황금의 성일 수 없음을 나는 그때 알았다.
화려했던 청조의 모든 정신이 켜켜로 쌓인 곳들은 하나같이 인스턴트 카레 라이스나 김치 찌개를 파는 음식점이나 커피집, 혹은 기념품 가게로 ‘전락’해 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 가게 중 한 곳에는 마지막 황제 푸이의 조카라는 사람이 아주 고전적인 치파오를 입고 수묵을 치고 앉아 있었다. 오오 참혹해라.
이제 그곳에는 청죽같이 시퍼런 대륙의 자존심과 칼날같이 번뜩이는 정신이란 존재치 않음을 나는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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