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적인 체질의 영향에서인지 젊어서부터 치아가 좋지를 않아 치통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치아가 좋은 것이 오복 중의 하나라는 말을 일찍이 경험하며 산 셈이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더니 빈말이 아니다. 내 경우도 자연, 이가 나쁘다보니 되도록 음식 씹는 것을 기피하고 물을 마셔대듯 무엇이든 마시는 쪽을 더 좋아한다. 그런 습관 속에서 즐겨 마시는 것이 커피이다. 20대부터 마시기 시작한 커피를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몇 잔씩 마셔대며 살고 있으니 이젠 완전 커피 중독자가 되어 커피를 마시지 못하면 무엇인가 산만하고 안정감이 없다.
서울을 방문했을 때 동창 친구들이 환영모임을 해주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동창들은 세월과 함께 머리가 허옇게 되고 탈모까지 된 볼품없는 할머니들로 변해 있었으나 들뜬 목소리로 얘, 너, 하면서 서로 흉허물이 없이 수다 떠는 우정만은 옛날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일에 마음 편하게 여길 수 있을 만큼 달관의 경지에 도달한 나이는 속일 수 없었고, 노심초사 증세가 찻집에 둘러앉아 차를 주문했을 때도 나타났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전통문화의 의식이 살아난 사람들처럼 몸에 좋다는 무슨무슨 전통 차만을 주문하는데, 유독 나 혼자만이 커피를 주문하니까 친구들은 질색들을 하면서 커피 아닌 다른 차를 주문하라고 야단들이었다. 커피를 마시면 건강에 나쁘다는 상식의 말들을 경쟁하듯 한 마디씩 해댔다. 혈압 환자에게는 혈압을 올리는 요소라는 둥, 수면에 지장이 있다는 둥, 건강을 해치는 독이라는 둥, 육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둥, 커피를 마시는 내 기호를 못마땅해 하는 우정의 말들이 궤짝 속의 생선들처럼 포개졌다.
각자 좋아하는 차를 마시며 우리는 해후의 시간을 학창시절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즐겁고 훈훈한 수다의 시간을 길게 가졌다. 물건은 다 새 것이 좋지만, 인간의 정만큼은 묵은 정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전에 늘 말씀하시던 어머님의 그 말씀을 그날 절실히 실감했다.
한국을 떠나던 날 배웅을 나온 친구들은 내 손에 선물 보따리를 들려주며 커피는 작작 마시라고, 건강에 유의하라고, 좋은 글을 쓰라는, 애정 섞인 충고의 말들을 저마다 표현하며 작별의 정을 나누었다. 태평양을 건너 내 둥지로 돌아와 열어본 선물 보따리 안에는 몇 가지 종류의 차들과 도기로 만든 찻잔이 들어 있었다. 마음에 담아둔 것을 내보이는데 한없이 따뜻한 정을 가진 친구들이다. 변하는 세월을 살면서도 마음속에 모든 것이 다 그냥 있는 친구들의 아름다운 우정은 코끝을 찡하게 하는 감동이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어둠이 깔리는 시간이 될 때면 왠지 마음이 쓸쓸해지며 그리움과 피곤이 몰려온다. 그 시간 나는 그리움을 마시듯 혼자 차를 마시는 고상한 새 버릇을 시작하고 있다. 뜨거운 물에 찻잎 하나하나가 순한 연록색으로 피어오르며 향긋한 기운의 감미로운 맛은 참으로 일품이다. 조용히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으면 한 잔의 차 안에 자연의 본체가 들어 있어서일까, 솔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가 들려오며 심신의 피곤을 말끔히 가시게 하고, 마음의 자리를 평안하게 해준다. 그 맛이 찻바람이며, 그 맛으로 차를 다시 찾게 되는 것 같다. 일찍이 영국과 중국에서는 차를 마시는 것이 하나의 사회제도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이제야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좋은 차는 좋은 물을 만나야 제 맛을 낼 수 있다고들 말한다. 사람의 관계 역시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허물없이 마음을 주고받는 좋은 친구, 약과 같은 친구들을 가졌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세계를 품어 안은 것 같은 큰 행운이며 기쁨이다. 그로해서 삶의 색깔이 달라질 수 있으며 삶의 행로가 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커피만을 마셔대던 내 생활습관이 이제는 조용히 차를 마시는 시간으로 바뀐 것도 순전히 약과 같은 동창 친구들의 덕이다.
오늘도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친구들의 숨결과 마음의 정을 느낀다. 따뜻한 우정의 심지를 깊이 묻어둔 등불 같은 동창 친구들, 비록 우리는 지구 반대쪽에서 함께 살아가도 우정만은 저 산천처럼 의구하기를… 기원한다.
김영중
창조문학 등단. 한국문협, 국제펜클럽 회원. 크리스찬문협 회장, 한국수필 해외 부이사장. 제1회 한국수필 해외문학상, 소월문학상, 미주펜문학상, 순수문학상. 저서 ‘건넛집의 불빛’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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