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작전교육국장 시절(4)
내가 작전국장으로 있던 시절 참으로 진기한 사건이 있었다. 아마도 한국 전쟁이 동족간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역력히 설명해주는 대목이었다. 나에게는 만주 하얼빈에서의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때 친했던 동기동창이 있었다. 아직도 남북간의 사정이 본인의 이름을 밖힐 처지가 되지 못해 동창이라는 이름을 쓰기로 한다. 그는 초등학교를 마치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양정중학을 다녔다. 내가 그를 다시 서울에서 만난 것은 내가 일본군 학도병으로 입대를 앞두고 고국을 방문한 1940년이며 나는 벌써 일본 시대 제국대학 예과격인 고등학교를 가 졸업한 상태이었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위로 출가한 누나와 아래로 두 누이가 있었다. 내 나이 20세의 군문에 입대할 낭만과 정열의 청춘기였으므로 나보다 4세 아래인 그의 누이에 호감을 갖게 됐었다. 그 후 내가 동창을 다시 서울에서 만나게 된 것은 내가 해방으로 일본군에서 풀려나와 서울에 와있을 때이다. 좌우익이 대립된 시기이다. 내가 조선 경비대 장교로 있을 때 그는 민애청이란 좌익단체에 가담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경비대에 정식 입대가 결정되기 전 서울대 법대 2학년에 편입돼 있어 서울에 위치한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해당) 근무 중에는 서울대 뒤 동숭동에 위치한 그의 집에 들러 군복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교실에 나가곤 했다. 나는 국대안 반대 때 학교를 중단하고 말았다. 내가 영등포에 위치한 보급중대에 부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1947) 그가 영등포 경찰서에 구속되었고 나의 도움으로 그는 구속에서 풀려나왔다. 한번은 그가 지리산에서 고생하는 친구를 생각하면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내가 친구를 위해 옳은 일을 했는지 의심을 해본 적이 있었다. 6.25 전쟁으로 우리는 서로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이었으며 동창의 집안 성분으로 보아 온 집안이 북으로 갔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내가 작전국장 시절 독감으로 2일간 집에서 쉬고 있을 때이다. 대낮에 방문객이 있었다. 나는 1950년 6월27일 미명 미아리 고개 방문에서 돌아오면서 지금의 종로 3가와 세종로 교차점에서(당시 그곳에 육군 헌병사령부가 있었다) 인민군의 전차 포위망에서 벗어나 서울 탈출에 앞서 김동선 동창의 집에 들러 학생복으로 갈아입었다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놀랍게도 그 동창은 김동선 군의 매부 강 선생을 앞장세워 우리 집을 방문한 것이다. 나보다 더 놀란 것은 집사람이었다. 내가 동창을 만나고 있는 동안 집사람은 안방에서 미닫이 창문을 약간 연채 우리의 만남을 시종 지켜보았다 한다. 집 사람은 해방 후 38선을 넘어 북에서 남하하며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 동창의 사연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자기가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학교에서의 나와의 격차가 심했던 탓에 기인했다 하였다. 나는 중학 4년 때 일본 제국대학 예과인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그는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의 학교 격차가 약 2년을 앞서 있었다. 6.25 전쟁으로 동창의 온 식구는 월북하였고 자기는 소련 하바로스크 공산 대학을 다녔고 인민군 정치 중좌까지 올라갔었으나 박헌영 남로당 당수와 이남파들의 숙청에 연좌되어 자기도 함경도 아오지 탄광에 보내져서 광부생활 중 자술서를 쓰게 되었다. 그 자술서에서 이남의 고관을 진술할 때 초등학교 동창으로 한국군에 있던 김일환장군과 나를 보고했다 한다. 그의 자술서로 그는 남파의 임무를 받게 되고 다시 본 계급으로 환원되었다 한다. 김 장군과 나를 포섭할 임무를 받고 정찰 1개 분대의 호위를 받고 서울 북악산 까지 호송되었다 한다. 정찰 1개 분대의 호위로 북악산까지 호송이 가능한 남한의 반공망의 허술한 상태는 상상할 수 없는 놀랄만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김일환 장군으로부터는 군의 예산 내역을 알아내고 나에 관해서는 내가 미국 육군 대학에 진학할 것이며 UN군의 작전사항을 가장 잘 아는 장성으로 미군 측의 신임이 두터우며 미국 유학 후에는 육군 작전국장이 될 것이라는 판다까지 하고 있었다 한다. 또 그의 이야기는 우리를 직접 만나지 말고 우리들 집에서 일하는 식모나 먼 친척 접촉부터 시도하라는 지시를 받고 왔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어머니는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하고 내가 좋아했던 누이동생은 서울 의과대학 출신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군의관이 되어 폭격으로 전사하여 현재 모스크바 대학에 유학중이며 막내 동생은 현재 북의 고관 부인이 되어 있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그 때까지 친척이나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은 자를 측근에 두는 것을 옳게 생각지 아니했다. 정실이라는 생각에서 인사만은 공평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동창의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그런 생각이 수정되었다. 능력과 공평도 중요하지만 믿음과 신뢰가 더 중요함을 동창이 가르쳐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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