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참모 지휘 대학 유학(2)
도착된 우리는 각각 독방에 안내되었다. 나에게 배당된 숙소는 2층으로 거실과 응접실, 욕실이 있는 방이었으며 아이젠하워 장군이 학생 시절 들었던 방이라 소개받았다. 우리는 각자가 본국에서 받는 월급 외에 미국 정부로부터 월 160불의 지원을 받았다. 우리의 본국에서의 월급은 너무 적어서 남겨놓은 가족들의 생계에도 부족했었다. 미국에서 지원하는 돈으로 자기의 방세, 식비, 전화료와 약간의 용돈은 마련되었으나 자동차 구입 등 사교비와 큰 지출은 불가능하였다. 내 기억에는 코카콜라 한 병에 5전이었고 영내 식당에서의 하루 식비는 5불이면 족했다. 나와 민기식 김용배 장군 3명이 아울러 차 한 대를 구입하고 김홍규 대령은 차 값 대신 운전을 하도록 했다. 미국에서 차 없으면 발이 없는 것인데 우리의 활동이 제한되었음은 짐작이 간다. 당시 남미에서 온 장교들은 가족에다 차까지 가질 수 있어 가족 관사에 수용됨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는 외국 장교들에게는 특별 관심으로 각종 행사를 계획했었다. 그 중 하나가 미국 가정을 알게 하기 위해 독신으로 와있던 장교들은 학교 교관들 가정에 외국장교 스폰서를 의뢰하였다. 나와 민기식 장군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나 학교 교관으로 있던 한 공군 중령의 가정이 스폰서가 되어 종종 그 집에 초대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려운 임무를 그 가정이 우리를 위해 담당하였다. 그 집에는 국민 학교를 다니는 딸이 하나 있었고 부인이 항상 상냥했었는데 귀국 후 바쁘다는 핑계로 서신의 왕래가 끊겼다.
9월부터 시작한 정규과정에는 200명 정도의 학생이, 그리고 한반에 약 30명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중 한국에서 나의 인접 사단이었던 미 3사단 정보참모로 있던 미 대통령의 장남 아이젠하워 소령이 있었고 전쟁 말기 백마산 방위를 위해 나의 사단에 한때 전투 배속되었던 미 전차 대대장 소령이 같이 공부하게 되었다. 전차 대대장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학과는 오전 9시부터 오후 2-3시에 끝난 것으로 기억되며 전술과 참모학 및 당시 중요하게 소개된 원자 무기의 용법이 강조되었다. 그중 원자 무기 사용에 대해서는 외국 학생은 들을 수 없는 시간이 종종 있었다. 나의 짧은 영어 실력으로는 강의를 잘 알아 듣기 어려웠으나 전술에 있어서는 부호가 많이 사용됨으로써 언어가 많이 생략될 수 있었고, 특히 나는 한국 참모학교를 졸업했던 덕을 많이 보았다.
한 가지 참모학교의 특색은 동양식 학습 방법에 젖어 있던 우리에게는 집에서 예습을 하지 않고는 강의 시간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이었다. 오후 일찍 학교가 끝나게 되는 것도 그를 위해서였고 나의 어학 실력으로는 매일 밤 11시가 넘어서야 예습이 끝날 형편으로 학교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모처럼의 미국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사회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미국 사회 공부를 위해서 외국 학생들에게는 종종 견학의 특별 기회가 계획됐었고 수개월에 한 번씩 있었던 전체 학생들의 가족 모임은 우리에게 사교인 동시에 미국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우리가 이 학교 기간에 제일 어려웠던 것으로서는 캔사스의 여름 기후를 견뎌내는 일이었다. 캔사스의 기후는 여름은 한국에 비해 더 무더웠으며 겨울은 서울에 비해 약간 추웠으나 만주 태생인 나에게는 문제되지 아니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실내에 2~300불짜리 에어컨을 들여놓으면 해결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장성들이라고는 하나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뿐더러 미국 생활에 익숙지 못한 탓으로 방법을 강구치 못했었다. 실내에 선풍기가 있어 항상 틀어 놓았으나 속내의 바람으로 생활하였고 찬물 목욕을 계속하며 수돗도물을 열어 놓게 되었다. 친구 중에는 욕조의 물을 잠그고 나오는 것을 잊어 학교 시간에 물이 넘친다고 교실에서 불려나가는 일도 있었다. 때로는 40분이 걸리는 캔사스 시를 나가게 되는데 에어컨 없는 차라 밖에서 들어오는 더운 공기를 막기 위해 오히려 차의 창문을 닫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우리가 학교에 들어간 여름은 유난히 더워 110도의 더위가 10일 간이나 계속된 기억이 난다.
음식도 문제였다. 중국요리도 미국식으로 우리에게는 서양요리 못지않게 입에 맞지 않아 고생을 했다. 다른 친구들이 만든 요리도 많이 얻어먹었으나 나는 요리 솜씨가 없어 근처에 유학 온 여학생 신세를 가끔 지기도 하였다. 다행히 처제와 경기 동기라고 소개 받은 국내에서 영문학자로 알려졌던 정 박사의 따님 형제가 그곳에 유학 와있어 가끔 식사를 부탁한 바가 있었으나 유학생에게 무리한 부탁이 되지 않도록 일주일 정도의 식품을 장봐주어야 했다.
유학생이라고는 남학생의 수는 적었고 징병을 피해 와있던 어린 학생이 주가 되어 남학생 보다 나이든 언니뻘 여학생의 수가 많은 편이 되었다. 남학생 중에는 한국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던 한 분의 만학도가 특색이었고 교포의 수도 적어 유학 와서 서로 가정을 가진 화가 한 가정이 캔사스에 살고 있던 것이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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