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은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으시는 거야?”
내가 차문에 막 머리를 찧던 순간이었다. 코미디의 한 장면이었다면 어정쩡한 내 모양새가 웃을 만했겠지만 상황은 심각했다. 나는 아픔으로 빨개진 얼굴을 한 채 튀어 나오는 욕을 막으려고 혀를 꽉 물었다. 상처가 얼마나 심한지 더듬어 봤다. 피는 안 났지만 굉장한 아픔이 전신에 퍼졌다. 아, 장모님은 어쩌면 저렇게 인정이 없으실까? 한국인들이 그렇게 많이 얘기하는 ‘눈치’도 없으신 걸까?
15년 전 장모님이 우리를 방문하셨을 때 한 식당 주차장에서 생긴 일이었다. 웃음을 그치긴 했어도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잘 이해 못하시는 것 같은 장모님은 그제야 괜찮으냐고 물으셔서 억지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했다.
그 후 5년이 지난 10년 전, 장모님이 다시 우리를 방문하셨을 때 또 사고가 났다. 태권도 수업 중 낙법을 배우다가 꽈당 넘어진 것이다. 사위의 태권도 실력을 자랑스럽게 구경하시던 장모님은 이번에도 웃고 계셨다. 아무리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해도 어깨뼈에 금이 가서 병원 응급실에서 팔을 고정시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데, 또 ‘눈치’ 없이 웃으시다니.
당시 도장에 있던 남자들은 바닥에 뻗어버린 내가 죽은 게 아님을 확인하고 나서야 내 넘어지던 모양새에 대해 농담을 하며 웃었다. 내가 그들에게도 화가 났던가? 그렇지 않았다.
남자들이야 그렇지 않은가. 대장부인 척한다고 할까. 하지만 이모님, 장모님 등의 중·노년 여성 경우는 좀 다르지 않은가. 그런 경우, 모성 본능에서 비롯된 연민과 동정심이 절로 생기는 게 아닌가.
‘sympathy’ 와 ‘compassion’. 이 두 단어는 ‘동정심’이라는 말로 번역되는데 ‘함께 느낀다’라는 의미가 있다. ‘sympathy’는 그리스어가, ‘compassion’ 은 라틴어가 어원이다. 동정심은 세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생겨난다. 첫째는 감지력이다. 상대의 느낌을 감지할 수 있는가? 둘째는 감정이다. 그 감지된 느낌이 나에게도 생기는가? 셋째는 표현이다. 나도 감지한 그 느낌을 상대에게 위로하면서 전할 수 있는가?
상대의 느낌을 감지하는 첫째 단계는 한국인들이 뛰어난 기술을 발휘하는 ‘눈치’와 같다. 개인은 물론 사회전체의 상황을 적용하는 가운데 꼭 집어내기 힘든 감정을 구별해내는 능력이다. 한국인 장모님이시니 ‘눈치’엔 문제가 없으셨을 텐데.
두 사건을 겪으며 나는 아내에게 투덜거렸다. 아파 죽겠는 사위를 보면서 웃을 수 있다니. 심술도 사나우셔라. 그런 내게, 아내는 오해하지 말라며 장황한 설명에 들어갔다. 신혼시절 꽤나 많이 받아서 이제는 끝난 줄 알았던 한국문화 총강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세월이 지나 이제 한국문화를 제법 이해한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어 아는 척도 많이 하던 나였는데.
아내 말로는, 생사가 걸리지 않은 내 실수로 생긴 일을 보며 당사자인 나의 어색함을 무마해주기 위해 잠깐 웃어주셨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 상황에서 제3자가 너무 걱정해주면 당사자가 더 어색해하고 긴장할 수 있으니 막연하게라도 웃어 주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준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장모님의 웃음이 대장부임을 증명하려던 큰 웃음이 아닌 잔잔하고 짧은 웃음이었다. 그제서야 아내의 설명에 십분 이해가 갔다. 장모님의 웃음이 고마워졌다.
그러니까 문화의 차는 ‘눈치’나 감정이입과는 관련이 없고, 단지 셋째 단계인 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떤 느낌이든 간에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가에 의해 문화 차의 폭이 더하고 덜해지는 것이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지금 나의 어머님이 중환자실 중에서도 더욱 주의가 요하는 특별 중환자실에 계시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깃줄과 호스로 기계에 연결된 채 컴퓨터 스크린에 그려지는 색색의 줄을 통해 몸 상태를 보여주시고 있다. 나는 걱정과 근심 속에 어젯밤을 여기서 꼬박 새웠다. 아내도 내 옆에서 시어머님의 시중을 들며 한숨도 못 잤다.
간호사들이 끊임없이 병실을 오가며 우리에게 이런저런 농담을 걸면서 웃는데, 아내는 화를 내며 불평한다. “어머님은 이렇게 생사의 고통 속에 누워 있는데, 간호사라는 사람들이 저렇게 농담이나 하면서 웃고 떠들고 있어. 말도 안돼!”
웃음이 나온다. 아, 이번엔 내가 아내에게 생사의 고통을 웃음으로 이기려는 미국문화 총강의를 해줘야겠구나. 병실의 창밖엔 이미 새벽이 찾아오고 있다. 오늘은 너무 힘드니 다음 날로 미뤄야겠다.
한국과 미국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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