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뉴햄프셔 예선이 실시된 2월18일 민주당 선거진영은 이른 오후부터 출구조사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민주당 경선엔 아이오와 연방상원의원이 출마, 타후보들은 아이오와 캠페인을 포기한 상태였으니 사실상 첫 경선인 셈이었다.
버락 오바마 못지않게 새 바람을 일으키며 질주하던 빌 클린턴은 그러나 겨울에 들어서면서 제니퍼 플라워스 스캔들과 징병기피 등을 비롯한 각종 악재에 발목을 잡혔다. 온갖 네거티브 보도가 잇달으면서 1월중순 29%로 압도적 선두를 달리던 지지율은 추락을 시작했고 선거캠프는 중도하차의 위기감마저 감돌며 절망에 휩싸였다.
상승세의 출구조사 결과가 전해진 것은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신바람이 나서 연설문을 작성하던 참모 중 하나가 ‘컴백 키드’란 단어를 떠올렸다. “다음날 미디어가 집중 조명한 것은 1위 후보가 아닌 기사회생한 ‘컴백 키드 클린턴’이었다”라고 당시 클린턴의 선거 참모 제임스 카빌은 지난해 보스턴 글로브지에서 회상했다.
16년만에 같은 곳에서 또 한명의 ‘컴백 키드 클린턴’이 탄생했다. 오바마의 아이오와 열풍에 거세게 떠밀렸던 힐러리 클린턴이 모든 예상을 뒤엎고 8일 뉴햄프셔 예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되살아난 것이다. 무엇이 그를 되살렸을까…9일 아침 미전국의 미디어들은 너도나도 앞 다투어 다양한 요인을 짚어냈다.
힐러리의 전략 수정이 먼저 꼽힌다. 선두주자의 안일한 자세에서 언더독의 필사적 전투태세로 바꾼 것이다. 분노가 감지될 만큼 날카로운 공격의 칼날을 들이대며 ‘말뿐인 변화의 거짓된 희망’을 비판, 유권자들에게 오바마의 실체에 대한 의구심을 심어준 지난 주말의 공개토론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상대적으로 오바마 진영은 다소 느긋해보였다. 그의 뉴햄프셔 유세는 ‘아이오와 승리 파티의 연장 같았다’고 워싱턴포스트는 꼬집었다.
이런 기류변화를 민감하게 느낀듯 표심은 ‘전문가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움직였다. 아이오와가 오바마를 향한 젊은 표의 결집을 과시했다면 뉴햄프셔에선 힐러리를 살리려는 여성표가 뭉쳤다. 많은 고학력 부유층 여성들이 오바마와 힐러리 사이에서 고심한 반면 저학력 저소득층 근로여성들은 절대적 힐러리 지지자로 나타났다. 또 강인한 힐러리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준 ‘눈물’에 감동한 여성도 있었지만 그 눈물을 비웃은 남성들의 조롱에 분노한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한가지 더 있다. 흑인인 오바마가 선거전에서 인종 카드를 쓰지 않은 탓인지 언론들도 인종편견을 노골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해온 다수, 특히 백인 기성세대의 ‘흑인대통령’에 대한 불편함은 아직도 깊게, 넓게 편재되어있음도 현실이다.
앞으로의 민주당 경선은 선두주자가 사라져버린 오픈 레이스다. 지금과는 아주 다르게, 복잡하게 그리고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가뜩이나 복잡한 경선과정이 금년엔 더 복잡해졌다. 각 주들이 당의 지침을 어기고 너도나도 경선일정을 앞당기는 바람에 그에 대한 처벌로 후보들의 유세가 금지된 주까지 생겼다. 미시간의 경우 오바마와 존 에드워즈는 아예 투표지에서 이름을 철회했고 플로리다에선 세 후보 모두 캠페인을 안하기로 했다.
아이오와와 뉴햄프셔가 이념적인 정치개혁 등을 조명한 선거전이었다면 앞으로 한달동안 잇달을 경선지역에선 보다 일상적인 ‘먹고사는’ 이슈가 거론될 것이다. 헬스케어와 모기지, 중산층의 대학학비와 소셜시큐리티 등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해결책의 제시가 요구될 것이다.
유권자도 백인에서 무지개연합으로 다양해진다. 15일 미시간에는 아랍계, 19일 네바다엔 히스패닉, 26일 사우스캐롤라이나엔 흑인, 29일 플로리다엔 쿠바계, 그리고 22개주 경선이 열리는 ‘쓰나미 화요일’엔 이 모든 인종블럭에 더해 아시안계가 포진하고 있을 것이다. 예측 불허의 접전에선 이들 소수계가 스윙보트가 될 수도 있다.
아이오와 참패가 힐러리 반전에 효과적 계기가 되었듯이 뉴햄프셔 패배도 오바마에게 좋은 사전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둘 다 전열을 가다듬고 각각 뼈아픈 첫 패배를 스승삼아 보다 알찬 캠페인에 돌입하리라는 뜻이다.
첫 번째 ‘컴백 키드 클린턴’은 그후 몇 개주에서 더 패하고서도 백악관 입성에 성공했었다. ‘클린턴들은 같은 실수를 두 번하지 않는다’는 정가의 속설처럼 되살아난 힐러리도 다시는 쓰러지지 않을지, ‘변화’를 약속하는 오바마의 감동적 웅변이 단단한 정책으로 성숙되면서 신뢰받는 지도자로 설 수 있을지 확인하려면 아직은 좀 더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쉽게 결판나지 않는 긴 선거전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변과 반전이 속출할 재미 때문만이 아니다. 기대와 설레임도 못지않게 크다. ‘첫 여성 대통령’도 기대되고 ‘첫 흑인대통령’도 가슴 설레게 한다. 어느 쪽이든 이번 늦가을엔 그들의 화려한 비상이 보고 싶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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