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야전군 창설(2)
한국군 역사상 처음 갖게 되는 야전군인 만큼 기간요원들도 군에서는 쟁쟁한 장교들이 보내졌다. 이는 후일 참모총장으로 있던 백선엽 대장이 초대 군사령관으로 부임한 것과 무관치 아니했다고 생각된다. 일반 참모 외에는 기억이 확실치 않다. 인사 참모에 박중윤, 정보에 유양수, 작전에 문형태 장군들이, 군수에 최경남 당시 대령이, 그리고 특별 참모로 공병에 윤태일, 통신에 최석남, 병참에 계창율 대령이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원태섭 장군이 나의 보좌를 위해 참모부장이 되었다. 이분들은 그 후 군에서 혁혁한 업적을 남겼으며 많은 분들이 지금은 세상을 떠났다.
그 중 유양수 장군은 5.16 당시 장관과 대사를 역임하고 현재 5.16 기념사업의 책임을 맡고 있으며 문형태 장군은 합참의장, 국회의원을 거쳤으며 현재 부인의 신병을 위해 미국 워싱턴 근교의 나와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 최석남 통신부장은 학구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육군의 통신감을 거친 그는 10년이 넘는 이순신 장군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이순신 전기를 두 권의 책자로 출간하였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군사 독재에 항의하는 운동에 교포들의 앞장에 선 사람이다. 그는 이민의 역경 속에 인쇄소에서 일하면서 모든 수입을 반독재 투쟁에 바친 헌신적인 사람으로 그의 파란의 인생을 끝냈다.
나는 지금도 후회되는 일이 있다. 될 수 있으면 참모들을 관대리에 묶어 놓으려고 노력했었다. 큰 키에 풍만한 체구의 군목부장 황석천 대령으로 기억되는 분이 있었다. 그 분은 장로교 출신으로 기억한다. 그 분은 종교 집회가 있다고 종종 서울 출장을 요구해왔다. 내가 그 당시에는 기독교에 기여하기 전이다. 타 참모에 비해 출장이 심한 듯 해 주의를 환기시키곤 했는데 기독교계의 간부들이 군에 입대돼있던 그 시절로 보면 당연한 활동을 군의 입장에서만 획일적으로 해석했다고 지금도 후회를 하고 있다.
야전군의 창설 준비 교육은 부처별로 미 10 집단 군단 참모들과의 접촉으로 시작되었고 부처에 따라 달랐으나 미 10 집단군 참모들에 의한 교육과정 혹은 업무 인계를 위한 준비 작업이 주종이었다. 역시 쿨라크 장군의 주도면밀한 교육 계획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야전군이 발족하면 미 10 집단군 하에 예속되었던 한국 군단이 야전사 예하로 들어올 기획을 예견하고 있었다. 나는 한번 미 8군 사령부 참모장 퍼킨스 장군을 초대해 8군의 조직과 참모장으로서의 참모 직무 통괄 문제에 대한 강의를 전 참모들에게 하도록 요청한 일이 있었다. 나는 작전을 하면서 군 사령관의 의도를 따르면서 시기적절한 결심과 참모 업무의 계속적 수행이 있기 위해서는 모든 업무에 유기적 협조도 필요하지만 사령관과 참모장, 참모장과 참모들 간의 결심 사항의 적절한 위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퍼킨스 장군은 그가 실시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민감하였던 것은 이미 참모총장의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부터였다. 나는 퍼킨스 장군의 강의를 참고해 야전사의 업무 결재 한계에 대한 규정을 만들었었는데 그 후 어찌 변동되었는지는 모르겠다.
1954년 이른 봄으로 기억한다. 이형근, 정일권 중장이 대장으로 승격하면서 이 장군은 1 군단장에서 합참의장으로, 정일권 대장은 다시 참모총장으로, 그리고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대장은 제1 야전군의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3 대장 체제가 되어 나도 유명무실했던 야전군 사령관 대리의 감투를 벗게 되었다. 나는 군사령부 조직에 따른 교육을 넘어 참모들의 인사와 거주 문제까지 무거운 책임감에 시달렸던 짐을 벗게 되어 훨씬 어깨가 가벼워졌다. 야전군이 전선의 작전 지휘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창설식은 1954년 4월경으로 기억된다. 관대리 사령부 연병장에서 예하에 들어올 예정이던 군단장과 사단장들이 초대되었고 이승만 대통령과 UN군 사령관과 참모총장과 야전군의 산파역을 맡았던 미 10 집단군 군단장 클라크 중장과 그의 참모들이 참석한 것은 물론이다. 나는 후일 야전사 창설에 공을 인정받아 대통령 개인 표창을 받았다. 한국의 기록은 불확실하다. 후일 내가 논산 건양대학에 나와 있을 때 병무청 기록을 보았더니 대통령 개인 표창 기록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집에는 이 표창장이 벽에 걸려 있다. 이 창설식을 기점으로 1군단장 김종오 장군, 2군단장 장도영 장군, 3군단장 강문봉 장군이 제1 야전군 산하 군단장이 되었다.
일선의 봄은 깊어갔다. 창설된 군사령부는 미 10 집단군 사령부의 위치에 있기에는 전선에 너무 가깝고 좌로 편재되었다. 군 사령부의 이동이 거론되었다. 당시 거론된 곳은 한강 이남 여주와 원주였다. 이곳이 거론된 데에는 당시의 통신망과 연관이 있었다. 일제시대 통신망이 집결된 장소가 여주이고, 다음이 원주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중 여주는 한수 이남으로 거리가 전선에서 떨어졌을 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 심리로 보아 군 사령부가 한수 이남으로 가겠다는 주장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은 원주가 후보지로 결정됐다. 나는 준장에서 소장으로 승진되었고 미 참모지휘대학 유학 과정에 선택되었다. 나는 유학 준비를 위해 6월초 참모장직을 김점곤 장군에게 인계하고 정들고 혼신의 정력을 받쳤던 제1 야전군을 떠나게 되었다. 나는 군 사령부가 원주로 이동함을 보지 못하고 관대리 사령부를 떠난 참모장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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