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사단은 진지 구축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내 기억에는 미 25사단과 교체되어 후방지역인 일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일동은 삼면이 산에 둘러싸인 분지로 기억하며 민가나 이용할만한 막사가 없어 처음부터 전 사단을 수용할 수 있는 막사 건축이 사단의 주 작업이 되었다. 나는 별 지원 없이 사단 규모의 막사 건축을 해야 했다. 근처에 화강암 돌을 캘만한 돌산이 있었다. 나는 막사를 건축할 재목을 보급 받은 기억이 없다. 한국의 산야가 전쟁 중에 많이 벗겨졌으나 휴전 후 사단들의 막사 건축으로 개인 산야들이 침범되고 산에 수림이 남벌된 이유가 정부에서 막사 건축을 시키면서 공적 지원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 기인된 점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후 국민들이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하다가 일 관헌들에게 시달림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많이 들어본 기억이 났다. 재목 없이 우리의 맨주먹으로 근처의 돌을 이용하면 부대가 이동해도 후일 민가가 쓸 수 있고 귀한 재목이 절약될 수 있지 아니한가 생각하였다. 또 군에서 제대 후 혹시 친구들과 함께 부근의 돌을 이용해 견고한 집을 건축하겠다는 진취성을 사병들에게 심어줄 기회가 될 것을 생각해 보았다.
막사 건축으로 사단 교육은 희생되었다. 막사 건축으로 상부에서 지원 받은 것은 돌을 캐기 위해 사용된 다이나마이트의 양이 증가된 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돌을 캔다는 데는 대가가 따랐다. 병사들의 피로에 따른 건강의 악화와 피복과 특히 구두가 빨리 소모되었다.
그러나 장병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막사가 군에서 제일 먼저 건축돼 육군에서는 모범 막사 건축 사단으로 지명돼 미 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의 방문을 위시해 많은 한국군 지휘관들의 방문을 보게 되어 군에서 돌집 짓기 경연이 벌어진 듯한 인상이었다. 나는 돌집 짓기 첫 경험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다음 짓는 사단들에게는 돌집 짓기로 파생되는 폐단을 경험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막사 건축이 끝나 사단은 휴전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사단 창설 기념식을 국방부 장관 손원일 제독 참석 하 일동 연병장에서 성대히 거행하였다. 사단은 화살머리 고수 작전에 대한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게 되었으며 강두향 작전 참모가 편찬한 ‘노도의 혈적’이라는 발간물이 소개되었다.
내가 사단장으로 부임할 때는 부사단장에 소병기 대령이, 참모장에는 2기생인 이종국 대령이 보직되어 있었다. 소 대령은 바로 다른 곳으로 영전이 기획되어 1기생인 한영주 대령이 부임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의 신청 없이 자청으로 김홍규, 배동걸 중령이 부임해왔다. 나는 두 사람을 참모직이 이미 다 채워져 있었으므로 참모장 특별보좌관이란 명칭 아래 특별 상황이 생길 때 활용토록 본인들의 양해를 받았다. 배동걸 중령은 명랑한 성격으로 사람들을 잘 웃겼으며 김홍규 중령은 유창한 영어능력을 활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후일 김홍규 중령은 초대 주월 사령관으로 추천되었으나 페의 한쪽을 도려낸 건강을 우려해 사절했다고 들었으며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는 나의 기준으로 부족하다 느낀 몇 명의 대대장을 교체했다. 그리고 한 연대장을 부정직하며 믿기 어렵다는 이유로 교체했다. 전쟁이 활발할 때다. 육본에서 2기생인 조재미 장군을 추천했다. 그는 지리산 공비 토벌에서 명성이 있었고 1사단에서 연대장을 이미 거친 사람이었다. 그는 부임하자 전시에 과거의 경력에 관계없이 묵묵히 싸워 주어 나는 그에게 위기에 헌신해준 데 감사하고 있다. 그는 4.19 때 15 사단장으로 서울 진입군을 지휘하면서 현명한 판단으로 발포 없이 시국을 수습하는데 기여한 사람으로 현재도 서로 서신을 교환하고 있다.
나는 또 휴전 후 연대장에서 딴 곳으로 영전하는 김필상 연대장 후임에 과거 비서실장 시대 보좌관이었던 김창파 중령을 임명했다. 그는 후일 심리전 감을 역임했으나 최근 뉴욕에서 암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나는 전투에 공적이 있던 연대장 한 명을 휴전 후 나 스스로의 요청으로 교체하게 되었다. 그는 31연대장으로 화살머리 전투를 지휘하고 훈장을 받은 연대장이었다. 내가 일동에서 막사를 건설할 때이다. 그 연대를 방문할 때면 대대장들이 웃음이 없는 것에 착안하였다.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사단장의 순시가 있어 나의 지적이 있으면 이유를 막론하고 나의 뜻에 따라 변경을 지시한다는 불평이었다. 사단장도 피상적인 판단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대대장들이 모여 결정할 때는 이유가 있어서이다.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적절한 설명을 가하든지 대대장의 동조를 받아야 한다. 나는 연대장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내 비위를 맞춰주는 예하 지휘관보다는 그의 부하로부터 존경을 받는 지휘관이 더 좋은 부대장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달라지지 않았고 대대장들의 불평도 계속 되었다. 결국 나는 그에게 제안을 하였다. 전쟁에서의 그의 혁혁한 공이 헛되기 전에 자리를 바꾸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얼마 후 그는 전직을 원했고 후임에 육사 훈육 중대장의 경력을 가진 백문오 중령으로 교체되었다. 교체해 이임한 연대장은 안정된 보직을 받지 못했고 전상을 이기기 위해 아편에 중독된 결과가 그의 생명을 단축시켰다고 들었다. 나는 그의 죽음의 원인이 나와 무관치 아니하다는 고민을 많이 한 바 있다. 특히 비상시도 아닌 전후에 내가 좀 더 참았더라면 하는 후회도 해보았다. 교체한 백 중령도 부하를 사관후보생 다루듯 엄격한 지도방법으로 부대에 잘 조화되지 못해 연대장으로는 성공치 못했다고 들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