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교회: 이집트 곱틱교회
이집트를 대표하는 교회는 곱틱정교회(Coptic Orthodox Church)다. 우선 우리에게 생소한 “곱틱”이란 단어부터 설명을 하면, 고대 애굽 바로임금(Pharaoh)의 후손들이 기원전 200년 경부터 희랍문화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기들이 사용하던 전통 언어에 희랍어 철자를 빌어 표현한 언어를 곱틱어라고 하고 이 언어를 사용한 전통적인 이집트인들을 곱트(Copts) 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집트가 7세기부터 이슬람의 문화권의 지배를 받으며 이제 곱틱이란 말은 애굽에 사는 전체 인구의 10% 정도인 토착 기독교인들을 칭하는 단어가 되었고 이들 중 95% 이상이 이집트의 대표 교단인 곱틱정교회에 속한다고 한다.
이집트 방문 중 우리는 많은 곱틱교회를 방문했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는 곳은 역시 전 세계 9백만 곱틱 교회 성도들의 총 본부라고 할 수 있는 성 마가교회이다. 이 교회의 지하에는 곱틱교회의 설립자 성 마가(St. Mark)의 무덤이 있다.
바나바와 함께 사도바울의 선교여행에 동참하고 예수님이 직접 파송한 70인의 전도자 중의 한 사람이던 마가는 주님 승천 후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이집트 땅으로 와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다가 이곳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다고 한다.
수요일 성경공부 모임에 간다고 하여 전혀 준비 없는 마음으로 따라 나섰다가 이 교회를 찾게 된 나는 참으로 내 평생에 잊지 못할 경험을 하였다. 교회를 향하는 버스가 얼마를 갔을까?
카이로 시내를 지나며 골목마다 빽빽히 들어선 이슬람 성전들과 그 종탑의 초승달 사인들 (십자가 대신 사용하는 이슬람 성전의 상징)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를 더 지났을까? 저 만치에 갑자기 무슨 대학 캠퍼스 같은 넓은 땅에 십자가가 우뚝 선 웅장한 교회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순간 가라앉은 마음이 흥분이 되면서 반가움을 가눌 수 없었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기에도 이런 교회를 세우셨군요...
교회 본당에 들어서니 이미 수 천명의 성도들이 자리에 앉아 있고, 앞에서는 젊은 청소년 찬양대들이 번갈아 가며 찬양을 하고 있었다. 교회 앞의 화려한 성화 장식을 보면 분명 러시아나 그리스 정교회 등에서 보는 모습이지만, 젊은 이들이 깨끗하게 옷을 차려 입고 활력 있게 찬양을 하는 모습은 꼭 한국 개신교회의 저녁 찬양예배를 보는 듯했다.
또 나중에 안 일이지만, 회중이 남자와 여자 석으로 구분이 되어 따로 앉게 되어있는 것을 보면 굳이 100여 년 전의 한국이나 200여 년 전의 서양교회의 모습이라고 보기보다는, 이게 이슬람 세계 속에 살아 가는 기독교 문화의 한 유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찬양이 계속되는 중에 우리는 교회 지하실에 모셔진 성 마가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애굽 북부지역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지도자들을 양육하던 마가는 박해자들의 손에 서기 68년 순교하는데, 밧줄이 몸에 감긴 채로 땅 바닥에 끌려 다니다가 몸에서 목이 잘려나가는 처절한 죽게 되며 교회의 성도들이 그의 목 없는 시신을 어느 바위 밑에 감춰두었다가 나중에 따로 찾은 그의 머리를 합하여 이 교회 밑에 다시 장사 지냈다고 한다.
역사 초기 마가의 순교로 이렇게 시작된 곱틱교회의 고난 여정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선교 초기 이교도들의 박해는 그렇다 친다고 해도, 사실 이들을 계속 어렵게 한 부류가 있는데 이게 우리가 소위 정통이라고 믿는 서양의 기독교 (동방정교회, 로마 카톨릭교 및 개신교회) 교파들이다.
물론 당시 여러 지역 교회간의 복잡한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큰 이유이기도 했지만, 서양 교회가 곱틱교회를 이단시 해 온 가장 큰 이유는 서기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결정된 기독론 때문이다. 정통교회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두 개의 구별 가능한 특성으로 보는데 반해, 당시 시리아 교회나 알미니안 교회와 함께 입장을 같이한 곱틱교회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성육신 사건 안에서 신비롭게 합해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성품임을 강조하면서 서방 세계와는 단절된 독특한 전통을 이어온다.
4세기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과 함께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외 선교에 나선 동로마 제국의 비잔틴 교회는 곱틱교회를 이단자로 핍박하며 저들의 교회와 수도원을 짓밟게 된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곱틱교회를 이 핍박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 7세기 이 지역에 등장한 이슬람의 아랍세력이다.
간혹 어려움을 당한 적도 있지만, 이후로 수백 년간 곱틱교회는 이슬람정부의 통치하에서 국가에 세금을 내는 한 법적인 보호와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특혜를 제공 받는다. 그러나 주류사회를 이룬 이슬람의 이런 포용정책은 결국 많은 이들로 곱틱교회를 떠나 이슬람으로 개종케 하였고 9세기 중반에 이르러는 곱틱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소수 그룹으로 자리잡게 된다.
18세기 말 나폴레옹의 침략과 함께 활발해진 서방교회의 선교와 19세기 말 영국의 지배는 이집트내 외세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을 낳게 하였고, 이로 인해 그간 이슬람 정부가 교회를 향해 보여준 포용 정책은 자취를 감추고 결국 1911년 이슬람은 이집트의 국교로 선포되기에 이른다. 이집트내 기독교인들은 이후로 특히 최근 9-11 사태 이후에 강해진 이슬람 세력내의 반서방 반기독교 적인 태도 하에서 더 어려운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다.
그러면 지난 2000년 동안 곱틱교회가 수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거치며 하나님의 교회로서 이집트 땅에 굳건히 서 온 힘은 어디에 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 힘은 교회의 터인 사막에서 온다.
그날 수요 성경공부에서 한 시간 정도 이어진 성가대의 찬양이 끝나자 십 여명의 감독들을 대동하고 곱틱교회의 현 수장인 세누다 교황(Patriarch Shenouda III)이 성전 안에 들어섰다.
설교이전 한 시간 정도 성도들이 쪽지에 담아 올린 질문을 읽으며 교황이 일일이 답을 하는데, 그 중 한 여자분이 어머니의 눈 수술을 해야 하는데 약 5천불 정도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자 돈이 중요 하지만 어머니의 눈을 보게 하는 것 보다 더 귀한 일이 없다고 하며 교회가 수술비 전액 지불할 것이라고 교황이 즉석에서 답했다.
순간 수 천명의 예배자 들이 자리에 일어나 박수를 보내며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 교회도 역시 상하의 거대한 조직을 가진 하나의 집단(Institution) 이지만 성령의 감동에 의해 살아 움직이는 성서의 초대교회 공동체임을 알게 되었다.
곱틱교회의 지도자들은 사막의 수도원에서 길러진다. 황량한 사막에서 겸손히 금욕과 금식, 기도와 말씀묵상 등을 통해 하늘의 음성을 들으며 저들은 지난 2000여 년 동안은 물론 지금도 그 척박한 아랍 땅에서 수많은 도전과 핍박을 이겨내고 굳굿하게 하나님이 주신 뜻을 이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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