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류지복 기자 = 국민은 이념이 아니라 실용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20일 당선 후 첫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이번 대선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당선자에게 이념 논쟁은 우리 시대에 걸맞지 않은 옷이다. 그에게 보수 대 진보, 독재 대 민주, 냉전 대 평화 구도는 이제는 넘어서야 할 과거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의 유산이다.
이 당선자는 지난해 서울시장직을 그만 둔 직후 한 측근에게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념은 별로 중요치 않다. 좋은 정책이라면 진보든 보수든 가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한나라당 경선과 대선 선거전 내내 경쟁후보들의 이념공세에 대해 저는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사구시를 앞세우는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며 `탈(脫)이념’을 강조했다.
지난 10월 한 일간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 당선자의 이념성향에 대해 응답자의 37.7%가 `보수’, 35.9%가 `진보’, 13.2%가 `중도’라고 답했다. 이념에 관한 한 이 당선자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각종 정책공약을 살펴보면 보수주의에 더 가깝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보수라는 이념적 토대는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그로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 3월 한 강연에서 보수에 대해서도 ‘꼴통보수’라는 일각의 비판이 있다며 한나라당의 수구적 이미지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한나라당의 보수 이미지보다 좀 더 자유로운 `중도보수’란 평가가 더 어울려보인다.
경제관에서 이 후보는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자율을 강조하는 시장주의자란 평을 받는다. 15년간 대기업 사장과 회장을 지내면서 CEO로서 잔뼈가 굵은 이력과도 무관치 않다. 성장과 삶의 질을 조화하는 내용의 `신발전 체제’ 역시 내용상으로는 분배보다 성장, 형평성보다 효율성, 균형보다는 경쟁을 우선시하고 있다.
이 당선자는 이념적으로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 하는 논쟁을 멀리하는 대신 `경험적 실용주의’를 국가경영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실용’이란 말은 노무현 정부의 `참여’라는 말과 비슷한 위상을 갖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시대정신인 경제살리기와 선진화를 실현하기 위한 소프트웨어가 바로 `경험적 실용주의’다.
정책공약집은 경험적 실용주의에 대해 관념과 이념이 아닌 경험적 실증으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라며 실용정부를 열어줄 `마그나 카르타’라고까지 평가했다.
그의 실용주의는 격식과 명분, 이념을 멀리하고 효율과 성과, 실질을 중시한다. 경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확정된 후 여의도 당사 사무실 환경을 바꾼 것도 그의 단면을 보여준다. 소파를 없애 딱딱한 의자로 바꾸고 각종 보고서의 양을 대폭 줄여 `문서를 위한 문서’ 작업시간을 줄인 일, 정장 대신 활동하기 쉬운 평상복을 입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기업 현장에서 체득한 실용주의가 정치영역으로 이어진 것이다.
다른 후보들도 앞다퉈 `경제살리기’를 대표공약으로 내세웠음에도 결국 유권자들이 그를 적임자라고 인정한 것도 사회 전반의 탈이념화에다 그의 실용주의적 행보가 맞아떨어진 덕분이라는 평가다.
실용주의 리더십은 글로벌 트렌드와도 닿아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 `빅3’의 최고지도자도 친미 실용주의 노선과 성장위주의 친시장적 경제정책을 펴고 있다. 한나라당 박형준 대변인은 담론의 정치에 매몰됐던 프랑스에 실용주의의 물결을 전파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유사한 리더십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실용주의는 한편에서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실용주의는 이념적 지향이 아니라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이회창 후보가 지난 11월 대선출마 당시 이명박 후보는 국가정체성에 대한 뚜렷한 신념과 철학이 없고 대북관이 애매모호하다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또 실용주의는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의 이기심을 충족하는데 유용한 수단이 아니냐는 점 때문에 `가진 자’를 위한 정책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당선자측의 한 인사는 가진 자는 경쟁하게 하고, 없는 자는 배려하는 따뜻한 시장경제의 기조속에서 실용주의가 구현될 것이라며 가진 자를 위한 정책이라거나,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비판은 수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jbry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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