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정에 서 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김수영 ‘구름의 파수병’ 중에서>
‘먼 산정에 서 있는 마음으로’ 지난 한해를 돌아보는 시점이다.
2007년이라는 열차에 올라타는 가 했더니 어느새 종착역이다. 연말은 한해라는 드라마의 완성, 연초에 계획하고 고대하던 일들, 걱정하고 두려워하던 일들이 2007년이라는 열차의 궤도와 인연이 있었는지, 없었는지가 확연히 드러났다.
연초에 그리도 궁금하던 2007년 한해의 삶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으니 긴 연속극의 마지막 편을 보고 난 듯한 시원섭섭함이 있다. 한국에서는 결국 ‘이명박 대통령’이 탄생했고, 미국에서는 주택시장이 더 얼어붙어 야단이며, ‘올해는 기어이…’ 다짐하던 후배는 이번에도 결혼을 못했고, 아들 걱정이 많던 친구는 아들이 대학에 편입한 후 착실해져 근심을 덜었고, 암에 걸려 앞날이 불안했던 친지는 건강을 회복해 잘 살고 있고 … 그 외 예측불허의 크고 작은 돌발 사태들은 연초에는 절대 알 수 없던 일, 연말까지 살아서 알게 된 일들이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흐른 시간만큼의 일들이 밀려오고 밀려갔다. 그런데도 “자, 이제 다 왔다!”하며 ‘열차’를 내릴 채비가 선뜻 안 되니 문제이다. 달력은 마지막 장인데 마음은 아직 초가을 언저리를 맴돈다. 현실의 시간과 의식 속의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 ‘시간 부적응증’이 나이 들수록 심각해진다.
요즘 중년의 친지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은 “시간을 도둑맞은 것 같다”는 푸념이다. 연말 샤핑 나가서 겪는 느낌이 그 비슷하다. 별로 산 것도 없는 데 돈을 다 써버려 허탈해지는 경험인데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365일이라는 긴 시간이 어느새 지났다.
우리는 무얼 하며 지난 1년을 보냈을까. 연방 노동부가 그 궁금증을 풀어준다. 노동통계국이 매년 실시하는 ‘미국인 시간 사용 조사’이다. 이 보고서를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시간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1년 12달 중 직장 일하느라 보낸 시간 4-5개월, 수면 시간 4개월여를 빼고 나면 3개월 정도가 남는다. 그중 TV 앞에 서 보낸 시간이 보통 6주, 밥 먹는데 쓴 시간 3주, 그 나머지 4주 정도로 집안일하고, 아이들 돌보고, 친구 만나고, 교회 가고, 취미생활 등을 하며 보낸 것이다. 운동에 쓴 시간은 5일 정도.
그렇게 보낸 지난 1년을 되돌아보자. 어떤 일들이 떠오르는가. 코발트 빛 하늘이 싱그럽던 어느 카페에서의 만남, 비행기 놓칠까봐 숨이 턱에 닿도록 공항을 달리던 일, 누군가를 걱정하느라 밤새 잠 못 자며 가슴 조리던 일 … 사람마다 기억나는 일은 다르겠지만 그 기억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괴롭거나 놀랍거나 행복하거나 … 감정이 담긴 일이라는 사실이다.
시간에 생명을 주는 것은 감정이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출근하고 일하고 돌아와 밥 먹고 자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일은 아무리 많은 시간을 쏟아 부어도 그뿐, 기억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나이 들수록 세월이 빠른 것은 도무지 새로울 것 없는 이런 일상과 상관이 있다. 의식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뭉텅이로 흘러가버리니 시간을 도둑맞은 기분이 될 수밖에 없다.
시간을 어떻게 배정하느냐가 인생의 지혜이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이 많을수록 체감 시간이 길고, 그만큼 오래 산다는 말이 된다.
어떤 경험을 우리의 시간 중에 담을 것인가. 삶의 질을 측정하는 한 방법으로 심리학자들이 ‘하루의 재구성’이라는 조사방식을 개발했다. 조사 대상자들에게 하루의 일과를 세세히 기록하게 한 후 각각의 활동 중의 느낌을 조사하는 방법이다.
그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보통 하루에 14.1가지의 활동을 하는 데 그중 가장 행복한 활동은 친한 사람들과 시간 보내기, 사교활동, 휴식. 가장 짜증나고 재미없는 활동은 출퇴근과 직장일. 가족이나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는 것이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결론이다.
2007년이라는 열차가 곧 우리를 내려놓는다. 나는 어디에 와 있을까. 이제 새 열차를 갈아타고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챙길 것인가. ‘먼 산정에 서 있는 마음으로’ 나를 돌아볼 시간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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