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비
‘國綱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국강상광개토경평호태왕비)’ 광개토왕릉비의 정확한 명칭입니다. 길이 3.35미터, 너비 2.7미터의 장방형 화강암으로 된 이 비석에는 총 1,775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141자라 합니다. 141자의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 중 앞뒤 문맥으로 내용 추측이 가능한 글자가 9자이니 132자는 읽고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4면에 돌아가면서 새겨진 이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는데 그 첫째는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하여 추모왕(고주몽), 유류(유리왕), 대주류(대무신왕) 등 3대왕의 계승에 관한 것과 광개토왕의 즉위에 관한 내용이며, 둘째는 광개토왕의 치적으로 백제정벌, 신라구원, 부여정벌 등에 관한 내용들이고, 셋째는 광개토왕이 생시에 내린 교시에 근거한 묘비와 연호의 규정입니다.
이 묘비는 서기 414년 장수왕에 의해 건립된 이래 발해 때까지 잘 보전되다가 요나라를 세운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차지하면서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습니다. 그리고 요를 멸망시킨 여진족이 금을 세운 후에는 광개토왕 능비가 금 왕조의 능비로 인식되면서 후대인들에겐 금의 왕성으로 인식되었다고 합니다.
명나라를 거치면서 그러한 인식은 거의 사실로 굳어졌고 명나라를 멸망시킨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면서 그곳을 청나라의 발상지라라고 주장하며 세인들의 출입을 금지시켰고 이 때문에 조선의 학자들은 이 능비를 금나라 왕조의 묘비로 여겼고, 이수광 같은 학자는 ‘지봉유설’에서 금나라 시조의 능비라고 기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무렵 능비는 이미 땅 속에 묻힌 상태였습니다.
이 능비는 1880년 경, 땅을 개간하던 한 농군에 의해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는데 현재의 중국 길림성 통화전구 집안현 태왕촌 대비가에 있으며 그곳은 압록강 중류 만포진에서 마주보입니다. 그 주변에서 많은 고구려의 고분과 유적지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된 이 광개토왕의 비석이 중국과 일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실록의 내용을 발췌하여 소개하겠습니다.
“그곳 수령 장월(관리)이 금석학에 조예가 깊은 관월산을 시켜 탁본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부분적인 탁본 을 만들어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중국의 금석학계는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공을 기울였으나 성취하지 못했고 그런 가운데 일본군 밀정하나가 능비의 탁본을 떴다. 사카와(사꼬오?)라는 이 밀정은 일본의 육군 중위로서 탁본작업을 하는 도중 일부 글자를 변조했는데, 바로 이 탁본을 기초로 하여 이른바 “雙鉤加墨本(쌍구가묵본)이 마련된다. 일본은 이 쌍구가묵본이 마련되자 군의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판독작업을 시작하여 1889년에 판독내용을 세상에 공포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도 1885년부터 비문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하고 있었는데 1889년에 일본의 비문내용이 공포되자 양국이 경쟁적으로 탁본작업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정교한 탁본을 얻으려는 노력이 가속화 되어 비면에 석회칠이 되는 등 변조마저 이뤄진다. 이런 까닭으로 내용은 오독되고 비의 면은 마모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1890년대 이전의 탁본이 거의 사라져 능비 연구에 차질이 생겼으며 일본은 러.일 전쟁 승리로 자유롭게 능비에 접근하여 능비 연구는 물론이고 주변의 유적지 연구를 독점한다. 이로 인해 비문의 해석과 유적지에 대한 해석이 일본의 시각에 한정되는 경향을 띤다. 그로부터 오랜 공백기를 거쳐 1957년에는 중국의 임지덕 등의 학자들에 의해 능비의 연구가 새롭게 시작되었고 박시형 등의 북한 학자들이 가담하였다. 그러나 1882년 사카와(사꼬오?)가 변조한 일부의 문자 때문에 그 정확성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제 중국과 일본이, 특히 일본이 자기나라도 아닌 고구려 광개토왕의 비문에 그토록 목숨을 거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을 기술합니다.
사카와는 1장 16자씩 133장의 탁본을 가져옵니다(1883년). 그 비문 1775자 중에서 그들이 가장 주목했던 대목은 16자이며 판독불가의 3자를 합쳐 19자 입니다.
‘倭以(왜이) 辛卯年(신묘년) 來渡海波百殘(내도해파백잔) O O O 羅以爲臣民(---라이위신민)’
倭(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를 낮추어 부른 말)을 멸하고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는 위 16자의 내용은 일본의 역사가 조선의 역사보다 월등하게 오래고, 신라와 백제를 자신들의 신민으로 삼았었기에 1910년의 한일합방이 침략전쟁이 아닌 고토 회복을 위한 당연한 전쟁으로 침략의 명분을 확보 할 수가 있다고 열을 올립니다. 반면, 그들이 미천한 미개의 나라로 폄하 시켰던 나라, 나라가 시작 되면 서부터 미개하고 미약하여 남의 나라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나라 조선, 그래서 영원한 일본의 식민지이어야 할 조선이 이 비석 하나로 입장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문 중 신묘년을 몇 년으로 보느냐가 학계의 쟁점이 되기도 하면서 한 때 비석을 폭파하여 근거를 없애야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일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학자들 중 학문적 야망에 불타는 요꼬이는 이 믿어지지 않는 비문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오히려 조선민족 스스로 그들이 한 때 일본의 신민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며 위의 자구 중 신묘년을 아오에가 주장하는 331년 혹은 391년 에서 자그마치 120여년을 끌어 올려 211년 혹은 271년으로 주장하였습니다. 120년을 끌어올린 이유가 신공황후의 역사 기록으로 꿰어 맞추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신공황후는 ‘일본서기’ 중에서 일본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수수께끼의 신비적인 인물입니다. 이 환상의 신현황후의 신라 정별에 관한 전설적 무용담은 후에 소개하겠습니다. 또한 요꼬이, 아오에 등의 인물소개 역시 뒤로 미룹니다.
www.waks.info에 들어 ‘협의회 자료실’을 방문하면 본보 연재 1호부터 등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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