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손 객원기자, 앨라스카를 가다
탓셴쉬니-알섹 강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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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멀리서 굉음이 들린다. 천둥 소리인 줄 알았는데, 빙산이 깨져 떨어지는 소리라고 한다. 굉음이라고 하니 상형 문자인 한자에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다. 굉 (轟)은 뭇 수레 소리 굉이라고 하는데 수레가 많이 한꺼번에 내는 소리를 뜻할 때 쓴다. 나무가 많으면 나무 빽빽할 삼(森)을 쓴다. 여자가 많으면 姦을 쓰는데 그 뜻은?
빗 속에서 텐트를 걷고 짐을 쌌다. 이번 여행의 휘날레로 빙산들을 지나면서 강을 따라 내려가야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Dry Bay라는 곳으로 약 15 마일의 거리로 무척 힘들고 위험한 코스이다. 게다가 빗 속에서 노를 저어야 하는데, 빙산 가까이 지나는 순간 빙산이 깨지기라도 하면 부상을 당하거나 보트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모두들 긴장한 분위기였다.
비가 오니 특별한 아침 식사도 없었다. 그냥 비상식으로 쓰는 고열량 음식들이었다. 짐을 모두 배에 실으니 침묵이 흐른다. 출발이다. 앞이 잘 안보이는데 마치 보물섬 영화에서 안개가 자욱한 속에 방향 감각없이 가는 보트같았다. 조금 지나니 무시무시한 빙산들이 나타났다. 빗 속에서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클릭클릭 샷터를 마구 눌렀다. 보트 옆으로 흘러가는 얼음 조각도 보였다. 이 빙산들은 강 바닥에서 시작해서 어마어마한 크기다. 바닥에 붙어있는 얼음이 떨어지면 그냥 강물따라 흘러간다. 그래서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 순간 실감하고 있었다. 수면 위로 올라온 빙산은 전체 크기의 5% 미만이라고 한다.
아! 이 빙산들을 보려고 지금까지 그토록 고생했었구나. 갑자기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왔던 미당 (未堂) 서 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떠올랐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서 정주 시인 하면 김 동리 (본명: 始鍾) 작가와 함께 한국 문학계를 주름잡던 분들이다. 또한 이 두분을 통해서 리더십 (leadership)에 대한 유형을 논하기도 한다. 김 동리 작가는 제자들이 서로 중복되는 영역에서 활동하지않게 분야를 직접 지정했다. 제자들이 절대적으로 그의 지시를 따랐다. 그래서 그의 리더십을 군림형이라고 한다. 한편, 미당 시인은 제자들이 쓰고 싶은대로 쓰도록 간섭을 하지않았다. 그의 리더십을 방임형이라고 한다. 군림형은 예스맨을 만든다. 누구 하나 바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주어지지 않는다. 군림형 지도자는 상황을 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 때로는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적을 만들 수 있다. 한편 방임형 지도자에겐 상투 위에 올라 앉으려는 부하가 있을 수 있다.
각설하고, 쏟아지는 비로 안경이 젖었다. 앞도 잘 안보이고, 살아서 가야한다는 생각에 빙산 구경이 오히려 짐이 되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빙산 옆을 지날 때에는 모두 넋을 잃은 듯 노젓는 일도 멈췄다. 빗속의 어두운 날이라 렌즈의 촛점을 맞추기도 쉽지는 않았다. 자동 촛점 카메라도 안될 때가 있다. 빗 속에 렌즈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이었다. 광각 렌즈를 처음부터 장착하지 않았으면 그만이었다. 빙산이 바로 옆에 있으므로 광각 렌즈가 절대적이었다.
시장기가 돌았다. 치즈, 샐라미, 허시 초콜릿 등 남은 간식은 모두 점심으로 떼웠다. 여기 이 지점에서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꽁꽁 얼어붙어 있던 빙산들이 조금씩 녹아 흘러서 바다 수면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다. 나 자신이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
흐르는 강물따라 이 빙산들을 벗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비가 그쳤다. 모두 지쳤지만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번 래프팅 여행의 클라이막스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텐트를 칠 무렵엔 하늘이 조금 열리고 그 사이로 해가 비췄다. 내일 마지막 날, 또 다른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 도전은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저녁 식사로는 처음부터 절여 놓았던 양고기였다. 그러니까 두주간 아이스 박스에서 잠들고 있던 것이다. 사실 양고기는 입에 댄 적이 없었다. 지친 속에 정말 시장이 반찬이었다. 살기위해 먹는지, 먹기위해 사는지… 최후의 만찬은 꿀 맛이었다. 이제 무사히 집으로 갈 수 있기만 바랄 뿐이었다.
<계속>
<폴 손, ktsf@paulsoh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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