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선의 첫 선거인 아이오와 코커스도 이제 8주밖에 남지 않았다. 본선에 들어가기 전 각 당의 후보를 선출하는 지명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당의 정체성이다. ‘보수적인’ 공화당과 ‘리버럴한’ 민주당으로 규정해온 전통적 아이덴티티를 감안한다면 이번 대선은 아마도 양당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전환점이 될지 모른다. 이념의 양극화를 부추겨 당선된 부시의 실정 탓일까, 이번 캠페인에서의 이념대결은 상당히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지지율 50%를 확보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은 이라크전 지지로 궁지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이란혁명수비대를 테러지원단체로 규정하는 상원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등 보수 색깔 표출을 개의치 않는다. 사회이슈엔 진보적일 ‘힐러리 행정부’의 외교정책은 상당히 강경해질 것임을 예상케 한다.
더 큰 변화는 공화당 쪽이다. 선두주자 루돌프 줄리아니는 ‘정통 보수’가 아니다. 극우파들이 듣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는 낙태권 및 동성결혼의 법적혜택을 인정하는 중도보수다. 그러나 지지율 34%로 1위다. 공화당 유권자 중 90%는 본선에서도 그를 택할 용의가 있다고 답한다. 줄리아니가 설사 대선에서 승리를 못한다해도 선명한 이념을 앞세운 남부기독교 보수파들이 이끌어왔던 공화당의 정체성은 적지 않은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한마디로 유권자들이 원하기 때문이다. 민생해결보다 이념대결로 치닫는 정치에 국민들의 염증이 폭발한 것이다. 사안에 따라 진보적 대책을 세우기도 하고 보수적 정책을 시행하기도 하면서 보다 살기좋은 환경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다. 사실 유권자가 정치가에게 그것 이상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미국에서 이같은 유권자의 요구를 알아챈 순간, 이에 맞춰 과감하게 탈바꿈하여 성공한 사람이 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다. 지난해 전국의 공화당 후보들이 추풍낙엽처럼 패배한 중간선거에서, 그것도 민주당 표밭인 캘리포니아에서 민주당 후보를 가볍게 누르고 압승을 거두었다. 공화당 전국위원회가 그의 성공변신을 2008년 대선전략의 본보기로 삼아야한다고 추천했을 정도다.
강경보수에서 실용적 중도보수로 돌아선 그는 “당의 이념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을 위한 정치다. 파당적 편협한 정당에는 표가 오지 않는다. 특히 젊은 세대에 어필하는 정당은 실용적 아이디어와 친절한 중도를 지향하는 품 넓은 정당이다”라고 강조한다. 미국만이 아니다. 극단적 이념대결은 국민의 생활 향상을 저해할 뿐 국가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영국과 독일, 그리고 프랑스에서도 각각 최근의 선거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결국 이회창씨가 출마를 선언했다. 한국의 언론들이 오랜만에 한목소리로 이회창씨의 출마를 질타·비난하고 있는데도 그의 지지율은 20%를 넘어서고 있다. 이해하기 힘든 그 20%를 업고 대선정국이 요동을 친다. 지지율 순위가 바뀌면서 새판짜기에 우왕좌왕 하다보면 어느새 선거일이 다가올 것이다. 그럭저럭 모양새를 갖추어가던 정책대결은 이젠 발붙일 곳조차 없어져버렸다. 시대에 뒤떨어진 소모적 이념대결이 그 틈새를 넘보고 있다.
정당한 명분을 찾기 힘든 그의 출마성명에는 극단적 이념대결에 연연하는 천착이 뚜렷하다. 그는 이명박씨를 ‘불안한 후보’에 더해 ‘모호한 후보’로 매도한다. 얼마전 “수구꼴통으로 몰릴까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발언에서 이미 예견했던 본격적 이념투쟁을 시작하겠다는 선언으로 풀이된다.
무엇을 근거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고 하는지,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의 근본적 변화에 적극 대응을 전제로 세워진 이후보의 나름대로 ‘보수적’ 대북정책이 왜 애매모호한지 그의 주장은 공감하기 힘들다. 그러나 과거의 지지기반 회복을 위해 이념대결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의 의도는 쉽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이념’외엔 잡을 것 마땅치 않은 그에겐 아쉽겠지만 냉전적 이념대결의 시대는 벌써 지나갔다. 한국민들의 사고도 정치지향적에서 생활지향적으로 바뀐지 이미 오래다. 한국의 사회가 선진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민심의 향방은 중도에 있다.
20%의 지지율이 존재하는 한 이회창씨의 계산대로 이번 선거는 보기 드문 ‘보수 대 보수’(정통보수 대 중도보수라는 선의적 표현도 있지만 부패한 이념적 보수 대 타락한 경제적 보수라는 악의적 표현도 있다)의 이념투쟁의 장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거의 결과자체를 바꾸기는 힘들 것이다. 일반 유권자가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우릴 잘 살게 해줄 것 같아서…청계천을 살리지 않았습니까! ” 이회창씨의 출마가 대다수 유권자들의 이처럼 간결하지만 명확한 마음을 바꾸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박 록 /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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