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왜곡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한 호족보다 힘이 없는 大和倭王(대화왜왕)에 관한 기사- 바꾸어 말하면 대화왜왕의 거처와 왕권에 관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일본서기’의 웅약 14년(서기470년)의 기사는 “대화왜왕과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한 豪族(호족)의 가옥이 대화왜왕의 것보다 견고하였으며, 같은 지역의 또 다른 호족은 대화왜왕의 보물을 전하지 않고 착복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安閑元年(안한원년;서기534년)의 기사는 대화에 인접해 있는 河內(하내)의 왕이 량전(양전)을 달라는 대화왜왕의 청을 거절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대화왜왕 및 원주민이 거처하는 가옥은 주춧돌을 놓고 그 주춧돌 위에 나무기둥을 세우는 礎石立柱(초석입주)의 가옥이 아니라 맨땅을 파서 거기에 나무기둥을 박는 식의 이른바 ‘흣태바시라‘(掘立柱:굴립주)의 가옥이어서 원시적이고 소규모였으며 기와를 올릴 수도 없었다. (후에 구체적으로 설명하게 되겠지만 초석입주식의 가옥에 기와를 올린 시점은 서기 690년대 藤原宮(등원궁)때 부터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당시 대화왜왕(일본)의 미개한 문화 및 군사적 국력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일개 성의 힘에도 미치지 못했음이 확연한바 강력한 왕권으로 조선을 지배하였다는 사실 왜곡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하겠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이름은 그 사용시점이 신라 문무왕 10년(서기670년)입니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2월조에 이르기를 “왜국이 나라이름을 일본으로 고쳤는데 그들 스스로 말하기를 해뜨는 곳에 가까우므로 이렇게 이름 한다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에 서기 670년 이전의 표기는 각종 사료나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 따라 倭 또는 大和倭 등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며 설혹 그 이후라 할지라도 역시 기록에 따를 것입니다.
이제 ‘일본서기’ 등에 나타난 大和倭(일본)의 造船(조선), 航海(항해) 수준을 살펴봅니다.
齊明(제명) 3년(서기 657년)의 기사는 “대화왜인과 僧侶(승려) 등이 신라에 가서 당나라에 보내달라고 청했으나 신라가 이를 거절하여 그대로 대화왜로 귀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續日本記(속일본기) 天平寶字(천평보자) 6년(서기 762년)의 기사는 당나라에 파견된 日本使節이 일본에서 만든 선박으로 安藝(안예:岡山)에서 難波(난파:大阪)으로 가는 도중에 배가 파손되고 뜨지 않아 일본사절이 당나라로 출발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圓仁의 入唐求法巡禮行記(입당그법순례행기)에는 서기 839년 당나라에 도착한 세척의 일본선원이 귀국하는데 자신들의 선박이 불실함을 싫어해 신라선원 60명이 운항하는 신라의 선박 9척에 편승하여 귀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唐으로 갈 때에도 선박 3척에 각각 탑승한 신라인들의 항해기술을 지도 받으며 갔었다는 기록도 곁들입니다. 따라서 7세기까지 大和倭의 使人이 일본선박을 타고 고구려, 신라, 중국에 갔었다는 <일본서기>의 수많은 기록을 어찌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舒明(서명) 11년 9월조 기사는 일본의 왕경과 신라(경주) 간의 항로 역시 신라가 장악하고 있음을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 역사의 말살, 훼손, 왜곡의 그 근간과, 역사 재정립을 위한 진정한 역사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다짐을 해보아야할 것 같습니다.
황원흥은 자신의 저서 ‘삼국사기 역사말살과 일본서기의 허구성’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진정한 역사정신은 날조와 기만 위에 세워질 수 없다”며 시급한 우리역사의 재정립과 민족혼의 회복을 외칩니다. 최근 민족의 개념에 대한 통념과 새로운 주장들이 섞이고 엉켜 혼돈이 일기 일쑤인데 필자 나름대로의 민족의 개념 설파는 차후로 미루고 위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삼국사기 내용의 훼손은 조선이 한반도로 옮겨온 초기부터 비롯되어, 明(명)과 淸(청)의 강요와 압력에 의해 소위 중국 정사에 의한 역사왜곡이 이루어졌으며, 그 뒤 高麗史(고려사)나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등은 모두 그 틀과 기준에 맞추어 수차례 재개편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보이며 이처럼 사대종주국 중심으로, 한반도 종속적 역사로 내용의 훼손이 자행된데 이어서, ‘삼국사기’의 본기는 물론 각종 ‘지’를 포함한 대량의 양적 질적 훼손은 ‘일본서기’의 날조 왜곡과 더불어 제국주의 일본침략기에 제국주의 사학자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저질러졌다고 추정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명과 청 중심의 역사왜곡만으로도 우리 역사 훼손의 수위가 심각한데, 이에 침략자 일본사학자들에 의한 철저하고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문헌의 칼질과 날조 왜곡시킨 바탕 위에서 ‘조선사 편수위원회’를 만들어 그 모든 날조 작업을 위장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일본의 역사왜곡에 초점을 두고 너무 억지로 꿰맞추는 것 아니냐, 조선의 대륙 역사마저도 민족 우월주의적 허황된 주장이라며 면박을 주실 분도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배 36년간에 망가진 민족의 혼과 얼은 조선조 600년간에 망가진 역사보다 훨씬 그 피해가 심각하여 우리의 역사를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만들었다는 것은 믿으셔야 합니다. 진정한 역사정신을 곧추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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