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요술피리’관람
보헤미안 클럽 오페라 여행
-김장섭 기자 동행취재기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오페라를 관람하는 일은. CD를 미리 구해 귀 세워 듣고, 관련 서적에 나온 줄거리를 읽고, 작곡가와 작곡 배경을 공부하고, 과거 공연 비디오도 보고 하는 등 준비에 적지 않은 에너지를 쏟았다. 몸통, 비늘, 발톱, 이빨 등을 다 그린 후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 넣자 벽화 속의 용이 실제 용이 되어 홀연히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는 중국 고사처럼, 힘든 여러 과정을 거치고 관람했을 때, 오페라는 비로소 나의 가슴으로 훨훨 날아들어 나의 것이 되었다. 물론 오페라 초보 기자여서 그렇지, 동행했던 일부 ‘꾼’들은 다른 느낌이었으리라.
<지난 12일 보헤미안 클럽 회원들이 샌프란시스코 ‘워 메모리얼 오페라 하우스’에서 요술피리 관람을 마치고 로비에서 함께 포즈를 취했다.>
오페라 사랑으로 모인 32명… 샌프란시스코행 버스에서도
줄곧 작품강의 듣느라 바빠… 경쾌하면서도 철학적이었던
공연에 “정말 좋았다” 이구동성… 척박한 한인문화의 아쉬움
나누며 돌아오는 길… 아리아의 선율 추억처럼 방울방울
클래식동호회 ‘보헤미안 클럽’(대표 이주헌)의 초청을 받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의 ‘요술 피리’(Magic Flute) 공연을 보기 위해 2박3일 여정에 오른 지난 10월12일은 완연한 가을날이었다. 누군가 요술피리를 불었을까. 80도대 고온이 물러가고 살갗에 닿아오는 바람이 제법 소슬했다. 대절버스는 구릉과 벌판으로 이어진 사막을 준마처럼 달리다 휴게소에 멈춰 섰다. 50~60대가 대다수인 32 명의 일행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주최측이 준비한 점심 도시락을 까먹었다. 한 목적으로 장도에 올랐기 때문일까. 모두들 스스럼없이 어우러진다. 시나브로 잎새를 물들이고 있는 포플라, 시카모어 나무에서는 음표처럼 앉은 새들의 황금빛 노래가 청아하게 부서져 내린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하우스 앞에 선 이주헌 회장. 유리창에 비친 건물은 시청이다.>
차가 다시 출발하고, 보헤미안 클럽의 이주헌 회장과 민순호씨는 본격 작업에 돌입한다. 요술 피리에 대해 퀴즈를 낸 후 CD를 상으로 주고, 각종 공연 DVD를 틀어주고, 보헤미안을 소개하고, 일행들의 안위를 챙기고 등등 쉴 새가 없다. 민씨는 참석 여부를 놓고 수십 명과 수도 없이 통화하느라 떠나는 날 새벽 3시에 일어나 짐을 쌌단다. 그런데도 전화를 받는 목소리에 상냥함이 넘친다. 이 회장은 “난 회장이 아니라. 프로그램 책임을 맡은 사람에 불과하다. 전문가는 더욱 아니다. 그저 오페라를 사랑하기에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을 뿐이다”라며 자신을 낮춘다.
요술피리에 대한 이 회장의 열띤 설명이 이어진다. “35세에 요절한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작품입니다. 대본은 쉬카네더가 독일어로 썼고요 . 따라서 내일 공연도 독일어로 진행되고 영어자막이 제공됩니다. 작품 배경에는 모차르트와 쉬카네더도 단원이었던 비밀결사조직 ‘프리메이슨’(Freemason)이 있습니다. 프리메이슨과 관계 깊은 숫자 3이 자주 등장하거든요. 서곡에 장중한 화음이 3번 울리고, 3명의 시녀와 소년, 노예가 등장하고, 3번의 시련이 있고….”
모차르트 사망 2개월여 전인 1791년 9월30일 빈 교외에서 초연된 요술피리는 고대 이집트 신전부근이 공간적 배경이다. 대사가 스토리를 끌어가는 가운데 사이사이 음악이 들어가는 ‘징슈필’ 형식의 작품. 바꿔 말하면, 빈의 민요, 이탈리아의 영창, 독일의 가곡 등 다양한 양식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2막으로 구성된 작품의 플롯은 다소 황당하다. 고대 이집트의 왕자 타미노에게 밤의 여왕이 나타나 납치당한 딸 파미나를 사악한 대사제 사라스트로에게서 구출해 달라고 부탁한다. 타미노는 파미나 구하기 위한 모험길에 오르는데, 도중에 새사냥꾼 파파게노를 만나 함께 간다. 그런데 웬걸? 타미노가 만난 사라스트로는 사악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고결한 인격의 현자였다. 사라스트로는 파미노에게 영혼의 정화를 위해 모진 시련을 통과할 것을 요구하고 파미노는 모든 시련을 극복한다. 그후 밤의 여왕이 나타나 사라스트로에 대한 복수를 시도하나 별안간 뇌성벽력이 치고 햇빛이 빛난다. 결국 밤의 여왕 일행은 천벌을 받아 영원한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이 회장은 “스토리가 중간에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점을 알면 이해가 한결 쉽다”고 말했다. 설명이 끝나자 차 천장에 달린 모니터에서는 20년 전 잘츠부르크 축제 때 녹화한 매직 플룻 공연 비디오가 나온다. 한참을 빠져들다 문득 창밖을 보니 가을비가 흩뿌린다. 유리창에 아등바등 매달리는 빗방울 너머로 바깥 풍경이 희미하게 지워진다. 숙소가 있는 뉴왁(샌프란시스코 동남쪽 약 35마일)에 도착,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9시 넘어 호텔에 체크인했다.
둘째 날인 13일 토요일. 하늘이 거짓말처럼 화창해졌다.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한 뒤 이미 샌프란시스코에 가 있는 마음을 좇아 버스를 타고 달렸다. 예약을 못했던 터라 기대했던 흉악범 교도소 ‘알카트라츠’ 섬 관광은 금문교 아래 부서지는 물거품이 됐다. 아쉬운 마음으로 철창행을 포기하고, 다른 곳을 둘러본다. ‘팰리스 오브 파인 아츠’ 뜨락을 산책하고, 2줄의 쇠사슬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금문교를 북쪽에서 감상했으며, 우뚝히 자리잡은 트윈픽스에서는 다운타운의 전경을 발 아래 거느리기도 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약 3시간이 남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더러는 버스에 다시 올라 시내 관광을 좀더 즐기고, 더러는 산해진미를 즐기러 택시를 불러 ‘39번 부두’(Pier 39)로 내달렸다. 그리고 몇몇은 아시안 박물관으로 가서 눈을 호강시켰다.
시간이 되어 드디어 대망의 요술피리 공연. 개별적으로 온 사람들을 포함해 총 42명이 함께 관람했다.
다운타운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에 자리잡은 ‘워 메모리얼 오페라 하우스’(Was Memorial Opera House)에 도착해 프리 렉처를 들었다. 거의 전부 예습한 내용들이고, 새롭게 안 것은 요술피리는 모차르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오페라 작품이 아니라 그의 생전에 초연된 맨 나중 작품이라는 사실, 세트와 의상은 LA오페라단에서 빌려왔다는 사실 정도다.
저녁 8시. 이윽고 막이 오르고, 3시간15분 길이 공연이 시작됐다. 유명한 플룻 아리아와 ‘파, 파, 파, 파, 파파게나!…파 , 파, 파, 파 파파게노!’라는 노랫말이 경쾌함을 더하는 이중창 등을 감상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동화적으로 시작돼 후반부부터 철학적으로 진행되는 까다로운 어려운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도널드 러니클스가 지휘하고 스탠리 가너가 연출한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제럴드 스카프가 디자인을 맡은 무대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등장하고 소년 셋이 새를 타고 날아가는 등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폴란드계 피오트르 베크잘라(타미노), 러시안 아메리칸 디나 쿠즈네트소바(파미나) 등 주요 배역들을 포함한 가수들의 노래는 전체적으로 훌륭했다.
<수준 높은 노래 실력을 과시, 관객들의 많은 박수를 받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의 ‘요술 피리’ 공연.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제공>>
게오르그 제펜펠드(사라스트로)는 맡은 노래들을 잘 소화했고, 크리스토퍼 몰트만 (파파게노)은 시종 웃음을 자아낸 유머러스한 배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음악을 선사했다. 에리카 미클로사(밤의 여왕)는 요술피리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 ‘복수의 분노 마음에 들끓고’를 콜로라투라 기교로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듯 열창,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다. 선율은 아름답지만, 가사는 ‘지옥 같은 복수심이 내 가슴에 끓어오른다. 네가 사라스트로에게 죽음의 고통을 안겨주지 못한다면 너는 내 딸이 아니다’는 무시무시한 내용. 상당히 어려운 트레몰로(초절기교) 곡으로 조수미가 많이 불러 한인들에게 친숙한 아리아다.
관람을 마친 보헤미안 멤버들은 한결같이 “공연이 정말 좋았다”고 입을 모은다. 로비에 모여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자정 넘어 숙소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몇몇 사람은 호텔 식당에서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며,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 대신 한인 문화의 척박함을 이야기했다.
어느새 14일 일요일. 귀가 길에 캘리포니아 첫 주도였던 몬트레이를 거쳐 17마일스 드라이브와 페블 비치 골프코스의 비경을 구경했다. 파도의 속살거림이 들리는 바다 풍경이 지친 몸을 위무해 준다. 지나며 보니, ‘천국’이란 한자 문패를 단 저택도 있다. 사흘새 흉허물 없는 친구가 된 일행들의 대화가 쉬임없이 이어지고, 6명이 좋은 사람들과 삶의 결을 윤택하게 가꾸어 싶어 보헤미안 회원으로 새로 가입했다.
이 회장은 “LA 오페라의 올 시즌 9개 공연 중 7개를 관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 9월 피델리오 공연은 무려 100명이 함께 봐 LA 오페라단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문화민족’ 이미지를 각인시킨 바 있다. 가든그로브의 한 샤핑몰 주차장에 내린 것은 어둠이 이슥한 밤 9시. 몸은 물 먹은 솜처럼 고단했으나, 아슴한 오페라의 추억 속에 마음만은 노래처럼 경쾌했다.
보헤미안 가입 문의 (213)304-9947 민순호, (714)917-9668 박광순
<글·사진 김장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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