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땅에서 살 아이들에게 굳이 한글을 가르쳐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정체성(正體性)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말과 글은 그 민족의 숨결이자 맥박입니다. 말과 글이 끊어지면 그 민족은 흡수, 소멸되고 맙니다. 정체성이란 한글을 배움으로 인해 자연스레 생성되는 가족 간의 일체감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뿌리의식이 깊은 사람이 흔들림 없이 더 높이 더 잘 자랍니다. 정체성이 약한 2세들이 1.5세들보다 중고교 낙제율이 더 높다는 최근 보도가 이를 반증합니다.
-정체성의 중요성은 잘 알겠지만 막상 한창 뛰어놀 아이들이나 생업에 바쁜 부모들에 정규 학업 외에 별도로 해야 하는 한글교육은 부담스러운 짐일 수도 있습니다.
한글교육은 실용적 관점에서도 큰 득이 됩니다. 이중 언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더 높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인 학생들의 경우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할 경우 SAT II에서 고득점을 받기 유리하고 이는 대학입시와 향후 취업, 연봉으로 이어집니다. 사회 진출을 할 때도 지금 같은 글로벌 시대에는 1개 언어가 아닌 2개 언어는 구사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한글은 세계 경제의 새로운 축으로 부상한 한국의 언어인 만큼 그 중요성이 더 높아진다고 봅니다. 최근 국제특허협약에서 한글을 공용어로 채택한 사례나 한미 FTA 체결 등은 한글의 수요가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갈수록 증대될 것이라는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 현재 워싱턴을 포함한 재미한국학교의 현황은 어떻습니까?
한국의 교육인적자원부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는 5만 명의 학생들이 한글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에는 모두 81개 학교에 4천명의 학생들이 재학 중입니다.
-15만 워싱턴 지역 한인 인구를 감안할 때 4천명이면 20%도 채 안 되는 2세들이 한글학교에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 봅니까?
부모들의 무관심이 가장 큽니다. 돌이켜보면 이민 1세대들은 의도적으로 한글을 외면했습니다. 자녀들이 하루빨리 영어를 습득해 미국생활에 잘 정착하길 기대했기에 집안에서도 형제간의 영어 사용을 자연스레 용인했습니다. 모국과의 단절을 통해 더 높은 성취를 바라던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2세들이 성인이 된 후 한국어를 배우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부모 슬하를 떠나게 되고 그때부터 정체성으로 인한 심리적 갈등을 겪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한다면 부모들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한글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해야 합니다.
-미국내 한글교육이 대부분 교회 같은 종교기관 중심으로 이뤄져 자녀 보내기를 꺼려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만.
한글교육이 미국에서는 제도교육이 아닌 만큼 아무래도 교회 등에 빚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교회는 교실이란 공간과 인력, 재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한글교육을 순수하게 지원하는 역할에 그쳐야 합니다. 목회자가 교육을 좌지우지하려 해선 안 되며 독립성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열악한 조건에서 운영된다고 들었습니다만 한글학교 운영 실태는 어떠합니까.
미국에서의 한국학교 운영은 한마디로 들판의 뿌리교육입니다. 한글 교육은 미주에서는 국민교육도 아니고 미 정규 교육도 아닙니다. 따라서 한국과 미국 정부의 지원을 거의 기대하기 어려운 자원봉사자 중심의 교육입니다. 교사와 교재, 교실, 재정 등 전 분야에서 찬바람 부는 한대(寒帶)에 놓여 있습니다.
-학교 운영에 드는 경비는 어떻게 조달됩니까?
자주적 해결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정부 지원금이라곤 미국 전체(NAKS)에 연간 5-6만달러가 나오는 게 고작입니다. NAKS가 매년 개최하는 연례학술대회 경비만 해도 25만달러가 소요됩니다.
정부 지원금 중 워싱턴 한국학교에 배당되는 돈은 1년에 1만4천달러입니다. 이는 한 학교당 연간 175달러가 지원되는 액수입니다. 이 돈으로 1년간 한 학교를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워싱턴의 경우 3년 전 ‘자조형 한글교육’ 모델을 개발했습니다. 동포사회 자력으로 해결 노력을 하자는 취지인데 이게 전미 14개 지역의 롤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모금골프대회, 일정금액을 약정해 지원하는 늘푸른 후원이사제 등 시스템으로 겨우겨우 운영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교재인데 한국 교과서와 동일한 교재로 배웁니까? 자체 개발해서 사용하고 있습니까?
재외동포재단에서 정부의 재원으로 교재를 만들어 미주로 보내줍니다. 다만 그 교재가 이곳 사정과는 동떨어진 측면이 있어 그대로 사용하기 곤란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역사, 문화 교재 개발이 시급합니다. 또 한국은 풀타임 교육이지만 미주의 한글교육은 주말 교육으로 연간 32-34일 수업이 고작입니다. 교육 진도도 다르고 면밀한 조정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재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어떤 겁니까?
영어 번역입니다. 동포 어린이들의 영어 수준은 네이티브급인데 번역의 수준이 떨어집니다. 교재 수정을 해야 하나 한국 관료주의의 벽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한번 수정을 하려다 실패했던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NAKS의 역사교재 편찬위원장으로 위촉된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구상을 갖고 계십니까?
교육학자인 허병렬 선생도 호소하셨지만 역사교육이 효과가 안 나고 가장 어렵습니다. 우선 미주 현지 교육의 실태를 감안해 방향을 잡을까 합니다. 또 방법론 측면에서 역사교육을 책에만 의존하는 것은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디오나 DVD, 만화 등 효과적인 비주얼 교육 개발이 긴요합니다.
-한글교육은 학부모나 학생 못지않게 동포사회 차원의 관심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동포사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현재의 교육은 무인지대에 방치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사들의 희생적 정신에만 의존해 유지하고 있습니다. 동포사회가 한글교육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해 진흥운동에 나서줬으면 합니다. 미주지역의 많은 캠페인중 사실 한글교육만큼 큰 사업은 없습니다. 장학사업도 대학생 위주에서 한글교육 지원도 포함시키는 등 조화로운 방향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글교육은 민족운동으로 승화돼야 합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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