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앨 고어 전 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뉴스가 전해진 이후 흥미로웠던 것은 수상 자체보다 반응이었다. 다소 시끌시끌했던 반응은 대체로 3가지 측면이었다.
첫째는 물론 가장 큰 궁금증인 그의 대선 출마여부였고, 둘째론 보수진영의 야유와 진보진영의 환호가 대비를 이루었으며 셋째로 7년만에 명암이 엇갈린 고어와 부시의 입지가 ‘전문가들’에게 신나는 분석꺼리를 제공했다.
보수진영의 반응은 야유를 넘어 분노로 치달았다. ‘왜 오사마 빈 라덴은 공동수상 안하느냐’(빈 라덴도 기후변화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비과학적 과장과 왜곡을 일삼는 선동가에게 상을 주다니, 노벨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지난주 영국의 한 법정은 고어의 지구온난화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엔 9가지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판정했다)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월스트릿저널은 고어의 이름조차 언급 안한채 ‘노벨상을 못 탄 사람들’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폭력과 압제에 맞서 생명을 걸고 투쟁하고 있는’ (자신들이 생각할 때 고어에 앞서 노벨상을 받아 마땅한) 전 세계 각국의 민주투사 이름들을 빼곡히 적어놓았다.
미국의 보수진영이 이처럼 거세게 반발하는 것은 고어의 ‘영광’이 상대적으로 부시에겐 ‘수모’로 부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부시에게 고어는 (마음의 빚을 느껴야 하는) 편안치 않은 상대다. 2000년 대선에서 부시와 대결했던 고어는 표를 더 많이 얻고도 백악관을 포기해야 했다. 보수로 기운 대법원의 판결 때문이었지만 극단적 투쟁으로 가는 대신 깨끗이 승복했었다.
정계일선에서 물러난 고어는 환경운동가로 변신했지만 부시정책에 대한 비판까지 거둔 것은 아니었다. 이라크전은 시작때 부터 잘못된 전쟁이라고 정면 경고를 보냈고 부시행정부가 ‘과학적 가설’이라며 외면해온 지구온난화의 ‘불편한 진실’을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알리려고 동분서주했다. 클린턴행정부 시절 고어의 적극 추진으로 실현되었던 미국의 교토의정서 서명까지 철회한 부시는 취임 초부터 환경오염의 ‘주범’인 석유자본에 편에 서서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고어의 캠페인을 대수롭지 않게 경시해 왔다. 그런데 노벨위원회가 고어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7년전의 패자 고어가 국제사회의 ‘선각자’로 화려한 비상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환상적인 보복’‘7년만의 설욕’등으로 불리우는 고어의 노벨상 수상을 고어 자신보다 더욱 기뻐한 사람들이 있다. ‘Draft Gore’, 고어의 대선출마를 ‘강추’하는 지지자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노벨상 발표 이틀 전인 지난10일 뉴욕타임스에 ‘앨 고어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이라는 전면광고를 실었다. 이미 13만6천명이 그의 출마촉구 진정서에 서명했다고 밝힌 이 편지는 “우리가 사랑하는 국가를 위한 이 시급한 요구”에 제발 제발 응해달라고 그의 출마를 간곡히 호소했다.
수상 결정 뉴스와 함께 ‘할까, 안 할까’라며 모든 미디어도 그의 출마여부에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지금으로선 안한다 쪽 분석이 단연 우세하다. 그보다는 그가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갖는다. ‘전 부통령 고어의 지지 선언’과 ‘노벨평화상 수상자 고어의 지지 선언’은 그 비중이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주로 힐러리의 지지도는 마침내 50%를 넘어섰다. 64%는 힐러리가 민주후보로 선출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어제 노르웨이 국영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고어 자신도 다시 한번 “대선 후보가 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고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고어출마에 대한 민주당내 찬반의견은 48%대 43%로 아직도 찬성이 높다.
무엇 때문일까. CNN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일말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경선에서의 각당 선두주자인 민주당 힐러리 지지도는 51%, 공화당 줄리아니 지지도는 27%다, 그러나 두 사람이 대결할 본선에서의 지지도는 힐러리 49% 대 줄리아니 47%로 막상막하다. 민주당은 힐러리의 경쟁력이 본선에서 무너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고어는 더 이상 2000년 대선에서 조롱당하던 ‘따분하고 뻣뻣한 나무 병정’이 아니다. 빌 게이츠, 앤젤리나 졸리, 오프라 윈프리 등과 나란히 선 국제적 명사다. 대의명분과 스타성을 겸비한 이른바 ‘하이브리드 사회운동가’로 불리운다. 59세, 아직 젊다. ‘배럭 오바마 못지않은 신선한 메시지, 힐러리에 뒤지지 않는 강인한 조직력, 거기에 그들 모두를 능가하는 지성과 카리스마를 갖춘 리더’ - 이처럼 근사한 후보가 어디 있겠느냐고 그의 지지자들은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난 이미 정치에 대한 사랑을 버렸다”고 고개를 흔든다. 정치적이 아닌 도덕적 이슈인 기후변화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그의 가장 충실한 동반자인 아내 티퍼도 남편의 정계복귀 거부를 기뻐한다. 그러나 ‘절대’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정치에서는 어느 누구도 ‘결코, 절대로’라고 말하지 않는 법이니까”라고 한 측근은 여지를 남긴다. 만약 민주당의 선두주자가 영 지지부진하다면, 그래서 민주당의 백악관 탈환이 위태로워진다면 ‘세계적 선각자’에서 ‘세속적 정치가’로 다시 전락하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고어가 대선 출마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같은 고어의 정치적 기후를 몇 달 전 시사주간지 타임은 ‘앨 고어의 마지막 유혹’이라고 불렀었다.
박 록 /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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