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렬(교육가)
한글날 이야기를 듣고난 학생이 제안을 했다. ‘우리 세종대왕께 감사장을 보내자’ 놀라운 발상이다. 감사장 보내는 일이 습관화 된 그들이 생각할만한 일이다. ‘세종대왕님께’로 시작된 그들의 감사장에는 어린 마음으로 감사하는 말들이 가득 찼다. 이 지역에 사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이런 기발한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세종대왕님께서 얼마나 기쁘셨을까.
올해가 한국 내에서 ‘한글날’이 다시 국경일로 되살아난지 두번째 맞이하는 한글날이고, 한글이 창제된지 561년이 된다. 한국 내에선 10월 9일 축하 행사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국학교조차 제 날 축하하지 못하고 그 전후에 행사를 하게 된다. 토요일에만 학교를 여는 현실이 불편하다.
필자의 경우는 미국생활 40여년에 감사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여러 민족이 어울려서 사는 방법을 배우게 된 일이다. 다른 하나는 한글의 고마움을 알게 된 일이다. 어느 민족에게나 고유의 언어와 글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어의 수효는 많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글이 없어서 소수의 언어들이 나날이 소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글이 있음은 얼마나 다행인가.
한국 역시 반만년의 긴 역사를 가졌지만 오랫동안 다른 나라의 글자를 빌려서 불편한대로 한국어를 표기하다가 말과 글의 일치를 본 것은 한글 창제 이후에나 가능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말만 있고 글자가 없는 소수민족은 그 말들을 한글로 표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만큼 한글은 어떤 말이나 표기할 수 있으니까.
‘한글’이란 첫째 큰 글, 둘째 훌륭한 글, 셋째 하나 밖에 없는 글, 넷째 우리 나라 고유의 글이라는 뜻이다. 한글은 앞의 말대로 위대한 글이다. IT의 세기가 되면서 한글은 더한층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셀폰의 문자메시지에서 그 유능함을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다.그렇다고 하더라도 한글을 배우자고 말하거나, 한국인이니까 한글을 배우자는 말들이 어린 학생들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영어만으로도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없고, 한국어는 학교 성적에도 관계가 없고, 한국어로 말할 상대도 별로 없어 특별히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더욱이 한글을 배우는 일은 노력에 비하여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적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언어와 글을 함께 배워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음성언어는 많은 경우 장소와 시간의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글은 대개의 경우 그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 또한 글을 익히면 말을 잊어도 글을 읽고 되살릴 수 있다. 말을 할 때는 상대방이 필요하다. 글은 혼자 읽을 수 있다. 그래서 한국문화를 이해하려면 한국어와 한글을 익혀야 하는 이유이다. 학교 교육에서 말하기·읽기의 초보를 배운 후에는 각자 문헌을 통하여 그 영역을 확대해야 한국문화를 옳게, 넓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에 이르기까지는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논다’와 ‘배운다’는 말뜻이 10마일쯤 먼 것 같다. 그러나 그리 먼 말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인생을 놀이 한마당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또는 배움의 연속이라는 생각도 한다. 하여튼 ‘논다’는 말은 ‘배운다’와 같은 무게가 없어서 좋다. 그래서 ‘한국말과 한글을 배워라’고 말하는 대신 ‘한국말과 한글하고 놀자’로 바꿔본다.
그랬더니 재미있는 생각들이 샘솟는다. 한글 감사장, 한글 퍼즐, 한국말 이어가기, 반대말·비슷한 말 찾기, 전화놀이, 한글 디자인, 속담 모으기, 한국 동요 모아 부르기, 전래동화 그림이야기 꾸미기, 극본을 써서 연극하기, 한국문화와 다른 문화 비교,… 등등 한없이 이어진다. 여기 예거
한 것들은 한국어나 한글놀이의 다양성이다.
한국어·한글 배우기 싫다고 달아나는 어린이들에게 게임의 방법을 소개하듯 같이 놀면 효과가 날 줄 안다. 우선 교실·칠판·책·공책·연필 따위는 살짝 접어두자. 그리고 재미있는 놀이판을 벌이는 것이다. 인생도 놀이의 한 마당이라면, 이런 방법도 유효할 것이다.
한국말과 한글하고 놀자. 그들의 좋은 놀이 친구가 되라고 외치자.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말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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