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막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 발표되었다. 합의문에 서명한 두 정상이 웃으며 악수를 나눈다. 노무현 대통령의 2007 남북정상회담이 ‘무사히’ 끝난 것이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한국의 분위기는 아무리 두 번째라지만 냉담을 넘어 무관심이었다. 지난해 북핵실험 이후 최악으로 치달았던 남북관계를 딛고 7년 만에 성사된 정상의 악수인데, 얼마만큼은 ‘감격’해도 좋을 사건이었다. (솔직히 일부러 설치된 노란색 선을 밟는 ‘의식’은 작위적이어서 감동을 자아내기엔 약간 어색하긴 했으나)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는 일 역시 충분히 ‘역사적’이다.
그런데 영 출발부터 썰렁했다. 첫 회담도 아니고, 지지도 낮은 임기말 대통령의 과욕이며 정략이라는 보수언론들의 비판이 쏟아지는 속에서 격려보다는 우려의 눈총을 받으며 북으로 향했었다. 하긴 그래서 방북 발걸음이 홀가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대가 낮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니까.
이런저런 구설수도 없지 않았다. 외신들까지 지적한 손님 맞는 김정일 위원장의 굳은 표정은 갖가지 추측 분석의 빌미를 제공했고 덕담이 지나쳐 찬사로까지 비쳐진 노대통령의 예의 말실수도 듣기에 불편했다. 그러나 회담 이틀째부터는 김위원장의 표정도 봄눈 녹듯 풀어지고 회담장 주변에도 기대감에 찬 활기가 떠돌았다. 프레스센터에서 선언문 관련 브리핑을 하는 청와대 대변인의 어조에도 자신감이 담겼다. ‘평화선언’ 채택이 가까워 온 것이다.
노대통령이 구상한 이번 회담의 핵심단어는 처음부터 ‘평화’였다. “한반도 평화정착을 최우선 의제로 다룰 것‘이라고 재차 강조해왔다. 사실 남북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다. 평화가 보장되지 않으면 경제, 정치, 문화 등 모든 협력과 교류가 불안하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군사적 신뢰를 구축하고 아직도 ‘전쟁 중‘인 비무장지대와 서해 북방한계선을 ‘평화지대‘로 선포하자는 노대통령의 구상은, 그에 대한 색안경을 쓰지 않고 본다면, 평화실현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거기에 더해 한반도 평화포럼, 종전선언, 평화협정…그러나 평화에 대한 어떤 구상도 머리에 핵을 이고 앉은 상황에서는 별 설득력이 없다.
이번 회담의 또 하나 키워드는 그래서 ‘북핵 폐기’다. 보수언론들이 가장 강하게 지목한 부분도 바로 이점이었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 천명이 안 들어간 선언은 선언이 아니다, ‘평화없는 평화선언’이며 오히려 평화를 깨뜨리는 위험한 함정이다…” 노대통령도 “김위원장 만나 북핵을 말하라는 것은 가급적 싸움하라는 얘기냐”면서 자신 없어 했던 부분이다.
타이밍이 좋았을까, 정상회담이 진행 중이던 3일 저녁 6자회담 합의문이 최종 선택되었다. 북한내 핵시설의 불능화와 핵프로그램 신고를 연내에 마친다는 북한의 약속이 명시된 합의문이다. 마침 이라크전과 이란 핵문제로 복잡한 정치상황에 처한 부시대통령이 한반도내 비핵화를 위한 큰 진전이라고 이례적으로 환영성명까지 발표했다. 북한의 핵폐기 의지를 인정해주는 동시에 북미 관계정상화에까지 청신호를 보내준 것이다.
정상회담에선 북핵이슈에 대한 부담이 대폭 덜어진 셈이다. 북한이 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준수를 재확인하고 6자회담 합의사항의 성실한 이행을 약속하는 이상의 북핵 언급을 요구하는 것은 어차피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6자회담이 진전, 장관급 회담으로 순조롭게 이어지면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평화정착 노력이 상당한 탄력을 받을 수도 있다.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북풍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뜻이다.
LA시간으로 3일 오후8시가 넘어 합의한 남북공동선언엔 ‘남북경제공동체’ 등 노대통령이 원했던 의제가 두루 담겨있다. 일부엔 남쪽 시민들이 요구한 것처럼 ‘실질적 구체적 사항’이 담기고 일부는 북쪽 인민이 선호하는 상징적 선언에 머물렀다. 절반의 성공은 달성한 셈이다.
노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무리한 강행’의 배경으로 두 가지가 꼽혀왔다. 첫째는 역사에 ‘평화 대통령 노무현’의 유산을 남기고 싶은 개인적 야망, 둘째는 대선에서 여권 후보에게 반전의 계기를 주려는 정략, 이른바 선거용 북풍이다.
사실여부는 접어두고 이것도 절반의 성공에 그칠 듯 싶다. 먼 훗날의 역사평가까지야 알 길 없어도 ‘평화선언 채택’의 기록은 일단 남게 되었지만 선거용 북풍은 전혀 맥을 못 출 것으로 보인다. 정상회담이 실패여서가 아니다. 설사 ‘평화 메시지’를 담은 북풍이 예상보다 뜨겁게 분다 해도 그 바람을 탈 후보가 없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동북아 평화의 새 지평을 열기 원하는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각에 남쪽에선 그 실천을 담당해야 할 여권의 후보들이 20%도 안되는 투표율의 경선조차 제대로 못치르며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박 록 /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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