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의 안방극장에서는 조선시대 22대왕 정조를 주제로 한 드라마들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특히 역대 조선 왕들의 독살사건을 다룬 서적이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인기와 관심을 얻으면서 사인이 의문시되는 조선 왕들 중에 정조가 포함돼 있는 것도 일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정조를 할아버지였던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서 죽어간 사도세자의 아들로 온갖 위기를 극복하고 왕좌에 오른 뒤 오랫동안 가슴속 깊이 숨겨 놓았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한을 풀기 위해 왕권 강화에 치중한 임금으로 배웠고 기억한다.
우리가 수 백년 전의 일들을 알 수 있고, 또 극화 등 작품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이란 역사서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태조부터 철종까지 모두 25명의 임금, 500년 가까운 시간을 담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이 사실 중심의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왕을 중심으로 한 궁궐 내 이야기들을 비롯해 당시 민초들의 생활상, 그리고 조선이란 한 왕국의 구조를 비교적 소상히 살펴볼 수 있는 기록물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와는 감히 견줄 수는 없지만 매주 월요일마다 연재하고 있는 ‘한인타운 50년사’를 취재하면서 놀란 것은 당연히 보관중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리만의 이민 사료가 턱없이 부족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100년도 아닌 지난 40여년의 시간을 더듬어보는데 제대로 된 자료들이 이처럼 부족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문서 기록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아예 흔적조차 없고, 빛바랜 사진들 역시 이런 저런 이유로 여러 사람들이 빌려간 뒤 돌려주지 않아 행방조차 묘연한 게 현재 우리의 현실이었다.
한인 이민사의 변화와 발전의 발원지이자 집결지라 할 수 있는 한인회의 경우 실록과 같은 방대한 양과 세세한 내용을 기대할 수 없겠지만 역대 회장단 회의록 또는 관련 문서들이 대부분 분실되거나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일부 회장들이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임기가 끝나기 무섭게 관련 자료들을 들고 나갔다니 더욱 기가 찼다. 다른 곳들 역시 상황은 비슷해 보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름대로 정확성을 기하려고 노력하지만 구술에 의존해야 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결국 이는 일부 시간과 내용에서 실제가 차이가 날 가능성으로 이어져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물론 전부가 그렇다고 단정 짓는 것은 아니다.
모 단체의 경우 설립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인 언론은 물론 미국 언론의 보도내용과 주요 인사들의 사진, 그리고 중요 문서들이 시간별·내용별로 한쪽 넓은 벽면을 빼곡히 차지하며 그들의 지난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단체 관계자들은 이를 후세에 남기기 위한 장기계획을 세우고 디지털화 작업을 진행중이다.
이유 불문하고 우리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수 없는 것은 결국 기록문화 의식 결여를 탓할 수밖에 없다.
일부 뜻있는 인사들이 종교계를 중심으로 자비로 미주 한인들의 발자취를 추적해 정리하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워낙 넓은 땅이다 보니 한번 움직이기가 쉽지 않고, 경비 또한 만만치 않게 들어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인사회 몇몇 유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얼마전 만난 한 인사가 비닐 백에 담겨 있던 것들을 책상 위에 풀어놓았다. 1960~ 70년대 라스베가스에서 활동하던 ‘김 시스터스’ 관련 자료들 속에 작은 크레딧 카드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살펴보니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제작한 카드식 방 열쇠였고, 그 겉면은 젊은 시절의 김 시스터스의 사진으로 장식돼 있었다. 당시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쩌면 미국 땅에 발을 디딘 ‘한류’의 기원일 수 있는 세 자매의 사진을 보면서 더 늦어져 그나마 남아 있는 자료와 기억들이 사라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우리의 지난 시간들을 재발견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황성락 특집2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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