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SF거주, 관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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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송편, 몇 해전 추석을 앞두고 한국학교에서 유치부 학생들과 함께 만들었던 송편이다. 제대로 하려면 쌀가루로 반죽해야겠지만 어차피 학생들의 체험 학습으로서 반쯤은 장난삼아 만들어 보는 것이라 깨나 콩으로 만든 소도 없이 밀가루 반죽만 가지고 갔다. 조그만 손들이 조물락거린 반죽은 까무잡잡하게 변해 가고 갖가지 희한한 모양-도저히 송편이라 부를 수 없는 모양도 있고-이 만들어 졌다. 추석 며칠 전이라 아직 한국마트나 떡집에 송편이 나오지 않아서 사진으로만 보여줬더니 아이들의 상상력과 장난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모양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식집 교자나 만두 비슷한 미국 파이인 코니쉬처럼 만들었고, 파이처럼 만들어 간식으로 가져온 사과조각을 넣고 애플송편이라고 하는 녀석도 있었다. 물론 송편이 반달처럼 생겼다는 내 말은 못 들은 척 로봇이나 동물 모양도 나오기도 했다. 아이들 중 몇몇은 자신들의 ‘작품’을 오븐에 구워 보겠다고 집에 가져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얘들아, 송편은 오븐에 굽는 게 아니라 솔잎을 깔고 쪄 내는 거란다.” 하지만 친구들과 밀가루 장난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꼬마들이 송편을 굽건 찌건 무슨 상관이겠는가.
추석 하루 전 한국마켓에서 송편을 좀 넉넉히 사고 아이들에게 주려고 예쁘게 빚은 것만 따로 골라 놓았다. 밀가루 송편을 만들었던 아이들에게 진짜 ‘먹을 수 있는, 제대로 된 모양의’ 송편을 보여주고 먹여 주고 싶었다. 다음 주 토요일에 한국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송편을 주었다. 좋아하는 아이도 있고 그 맛을 낯설어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젠 추석에 송편을 먹는다는 걸 다 안 것 같다. 그런데 아이들이 추석을 송편 먹는 날로만 기억하지는 않을까? 추석때는 차례도 지내고, 성묘도 가고, 햇곡식과 과일을 먹고, 보름달도 보고, 큰 집에 친척들이 다 모이거나 아니면 꽉꽉 막힌 도로에서 고생해도 고향으로 가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코리안 땡스 기빙’이란 말 만으로는 다 담지 못하는 그 정취를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다른 한편으로 생각나는 것이 있다. 이민오기 전 어린 시절 명절 즈음이면 텔레비전에서 가수들의 해외공연을 보여 주곤 했는데 기억나는 장면 중 하나가 가수들의 흘러간 옛노래를 들으며 눈물짓는 노인들의 모습이었다. 특히 현인 할아버지가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타향살이’라는 노래를 부르면 겨우 눈물을 참던 남자 어르신들까지 눈물을 흘리곤 했다. 어린 나는 그 분들의 눈물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한참 혈기 왕성했던 막내 삼촌은 좋은 명절날 꼭 사람 울리는 노래를 부르며 청승떤다고 못마땅해 했다. 어쩌다 보니 나도 이민을 와서 ‘타향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나도 세월이 흐르면 그 때 우시던 그 분들의 심정에 공감할게 될까?
공감의 주파수가 조금씩 다를지언정 ‘타향살이’에 눈물흘리는 어르신들과 나, 추석이란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코리안 땡스기빙’이라고 부르는 아이들과 나 사이에 흐르는 공통된 정서를 느끼곤 한다. 추석같은 명절에 더욱 생각나는 고향, 세대 간 그 의미는 조금씩 다를 지 모르겠지만 모두에게 특별한 명절과 고향의 의미. 비록 몸은 고향에 가지 못해도 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부모 형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의 목소리를 들으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고향과 가족의 정을 느끼는 모습이 많은 이민가족의 추석풍경이다.
명절과 세시풍속의 의의 중 하나가 단조로운 일상에 변화를 주어 생활에 활기를 주는 것이라고 한다. 한국처럼 추석이 휴일이었다면 더 여유롭겠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추석이라고 한국마켓에 쌓인 송편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송편도 맛있지만 그보다는 일가친척이 모여 송편을 빚으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던 추억이 떠올라서 그러는가 보다. 송편 예쁘게 빚으면 예쁜 딸 난다고 웃으시던 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특별한 음식이 있고, 보름달 보고 시차 헤아려서 한국에 전화할 시간 기다리게 하고, 세대를 아우르게 하는 추석은 비록 밀가루 송편을 빚어 오븐에 굽는 타향살이를 하고 있더라도 즐겁고 의미있는 명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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