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벌레’ 하면 한국의 입시생들이 떠오른다. 미국에도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처럼 지독하게 책과 씨름하는 학생들이 있지만 ‘악바리 공부’는 미국학생들에겐 왠지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다.
하물며 상아탑 대신 훈련소나 전쟁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군인들이야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한국 입시생, 하버드 공부벌레들에 견줄 만큼 면학에 정열을 불사르는 군인학생들이 있다. 북가주 몬터레이의 국방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사회, 문화 등을 익히는 학생들이 그렇다.
훈련 중 다리가 심하게 삐어도 개의치 않는다. 한 학생은 목발을 집고 등교한다. 직업군인이라 정당하게 병가를 낼만도 한데 진도를 따라가지 못할세라 쉼 없이 수업에 나온다. 계단을 힘차고 오르내리는 다른 학생들이 부러운 눈치지만 엘리베이터에 의지해서라도 제 때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다는 데 만족한다. 몸은 불편하지만 눈에 총기는 여전하다.
다리가 부러져도 깁스를 한 채 다닌다. 오토바이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이 그만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골절상을 입었다. 몸이 아파도 병실에 드러눕지 않고 동료 학생들처럼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다행스러워하는 표정이다.
톱을 달리던 학생들도 간혹 예기치 않게 복병을 만난다. 한 학생이 주말에 친구들과 함께 캠퍼스 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그만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약 1주일간 병원신세를 졌다. 담당 교수는 이 학생이 진도를 따라오지 못해 기존의 클래스를 떠나야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 학생은 건재하다. 몸은 깨끗이 나았고 그 어느 때보다 학업에 열심이다.
성적이 떨어졌다 싶은 학생들은 이를 악문다. 3주마다 치르는 시험에서 한 과목 과락을 맞은 한 학생은 시험 이후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걱정이 태산이었던지 며칠간 하루에 서너시간만 자고 책과 씨름했다고 한다. 강의 중간중간의 쉬는 시간에 토막잠으로 수면부족을 달랬다.
비교적 무난한 점수를 확보하고도 부족한 듯 교수 연구실을 찾는 학생도 있다. 한 학생은 중위급이다. 상위그룹에 끼기 위해 자신의 약점극복에 애쓴다. 쉬는 시간에 연구실을 기웃거린다. 한국어를 한마디라도 더 연습하기 위해 교수에게 말을 건다. 다른 학생들이 소홀히 하는 틈새를 노린 것이다. 일종의 한국어 배우기 ‘블루오션’ 전략이다.
그러나 교수들과 일일이 마주 대하고 대화를 나누지 못한 학생들은 방과 후 기숙사에서 동료 ‘실력파’들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개인 교습을 받는다. 돈을 내고 하는 교습이 아니라 우정과 동료애를 깔고 하는 교육이다. 교과과정을 이미 배운 고참 학생들이 자상한 ‘선생’이 된다.
한국어를 공부할 때는 자존심도 내버린다. 군인학생들은 적게는 10대 후반이고 보통 20대 초중반이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간혹 30대 초중반의 장교도 있다. 대위와 병사들이 한 반에서 실력을 겨루기도 한다. 군대에서는 까마득한 계급차이지만 강의실에서는 오로지 한국어 실력만이 가치를 발산한다. 그래서 대위도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큰 눈을 더욱 부라린다.
시험을 볼 때면 다른 병사들보다 한결 더 긴장한다. 시간 내에 문제를 다 풀 수 있도록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며 연필을 곧추세운다. 식솔 돌보랴 머리가 복잡한 대위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 귀를 쫑긋하며 들은 강의내용을 답안지에 쏟아 부으려고 몰입한다. 계급이 지배하는 군대답지 않게 강의실에서는 ‘평등’이 지배한다.
학생들의 공부스타일은 각양각색이다. 단시간에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이 있고 밤늦게까지 지구전으로 나가는 학생이 있다. 학습능력도 천차만별이다. 한번 설명하면 알아듣는 학생이 있는 반면 여러번 반복해도 갸우뚱하는 학생이 있다. 학력도 같지 않다. 대학원을 다닌 학생, 대학을 졸업하거나 휴학한 학생, 고등학교만 졸업한 학생이 뒤섞여 있다. 나이도 다르고 군복에 단 계급도 다르다.
그러나 한가지 동일한 것이 있다. 한국어를 정복하려는 열의다. 이 공통분모로 무장한 학생들은 오늘밤도 기숙사와 도서관의 불을 밝힌다.
박봉현 / 미 국방 외국어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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