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느림>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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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밀란 쿤데라, 1929년 체코슬로바키아 브륀 출생, 프라하 연극, 예술 아카데미 영화학과에서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수업, 이후 모교 강사로 활동, 1963년까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 주도, 1968년 모든 공직에서 해직, 모든 저서 압수, 소각됨, 1975년 프랑스 망명, 교수로 재직. 소설가, 번역가.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다 보면 자연, 책의 표지 뒷부분 작가소개로 되돌아가 프로필을 점검하게 된다. 그가 몇 년 생인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같은 시시콜콜한 뒷배경 조사를 하게 되는 즉, 그의 농담같은 글쓰기에 기인한다.
그의 글쓰기는 묘한 방식으로 관조적이며 또한 희화적이다. 한없이 가벼운 현대적 감각을 가장한 바로크적 퇴폐미와 우울, 역사를 비틀어 비역사화하는 삐딱한 위트, 철학의 중심부에서 캐낸 비철학의 정신,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지워 놓음으로서 세계와 진리에 대한 근대적 이성을 무력화시키는 시건방짐 등이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쿤테라의 소설이 ‘그러하다’ 혹은 ‘이러하다’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글쓰기를 통해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역사와 비역사, 철학과 비철학 사이를 새털보다 가볍게 오가며 마치 자유분방한 문화 게릴라처럼 끊임없는 농담과 익살로 삶에 대한 가로지르기를 시도하는 이유에 있다.
2.
20세기의, 가장 진지하고도 무거운 사상을 꼽아보자면, 당연히 공산주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일 터. 쿤데라는 이 납처럼 무겁고 용광로처럼 뜨거운 사상의 봇물, 그것도 스탈린 시대의 한가운데서 63년 ‘프라하의 봄’이 탄생시킨 수많은 반체제/ 반지성 운동을 경험했던 것.
그가 한때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했었다는 이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쿤데라가 보여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로서의 기질은, 68년의 한 사건을 계기로 급격한 전환의 시기를 맞게 된다.
당에서의 제명과 모든 공직에서의 해임을 계기로 쿤데라는 자유주의적이고 노골적인 반역사주의자적 면모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프랑스 망명. 그가 망명지로 프랑스를 선책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망명 초기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직도 진지한 근대주의자적 면모를 보여주는 소설이었다면, <농담>, <웃음과 망각의 책>, <불멸> 등과 같은 망명 정착기의 작품에는 예의 그 진지함이 당연히 탈락되어 있다. 60-70년대의 소설적 면모가 완전히 해체되고 새로운 글쓰기에 도달한 쿤데라의 작품 세계의 정점에 소설<느림>이 우뚝 서있다.
3.
<느림>은 삶의 감각에 대한 재발견이다. 그래서 그것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명상집, 혹은 문명 비판서, 혹은 지식 잡학사전처럼 보인다.
고전적 소설의 시간 구성과 구도조차 존재하지 않는, 무척 아방가르드한 소설 <느림> 속의 시간과 인물과 곤간은, 현재형의 프랑스 시골의 외딴 성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 속의 그것과 18세기의 한량 비방 드농의 소설 <내일은 없다>의 그것들이 마구 뒤섞이고 혼효되어 나타나 있다.
현대의 멍청이이자 어설픈 춤꾼인 뱅상과 임마쿨라타와 지식인 베르크가 18세기의 인물인 기사와 후작과 T부인등과 혼돈되는 것은 무엇 땨문인가.
이유란 지극히 간단하다. 말하자면, 그들이 별개의 존재가 아닌 까닭인 터. 시간과 공간, 역사와 현재,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가 해체된 한 지점, 요컨대 <느림>이라는 소설 속이거나, 지금은 값비싼 호텔이 된 프랑스의 성이거나, 그도 아니면 거짓말이나 농담 속에서, 근대적 이성 즉,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일반적 지식과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모든 곳에서 그들은, 아니 등장인물이 아닌 인간들조차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
마르틴 부버를 인용하자면, 각각 떨어져 있는 ‘나’와 ‘너’가 아니라 ‘나-너’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나-너의 관계란 쿤데라 식으로 말해, 모든 진지한 것, 근대적인 지식, 절대적 진리의 비틀기와, 위트와 농담과 몸 가벼운 월담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4.
생은 깃털처럼 가볍고, 삶은 반쯤 무너진 모래성처럼 허무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여드름 난 사춘기 소년조차 내뱉을 수 있는 이 말이 쿤데라의 글쓰기를 통할 때 사정은 확연히 달라진다. 쿤데라의 글쓰기 속에서라면, 온 생을 박살내겠다는 기세로 내리 누르던 비관적인 감각들조차 한 순간에 농담이 되고 만다. 그 천근만근의 삶이 무게감을 상실하고 깃털처럼 가벼이 우리 머리 위를 부유할 때, 삶의 허무한 속성은 맨 얼굴을 드러내며 우리를 보고 피시식, 웃고 마는 것이다.
쿤데라는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대가 삶의 표정을 흘낏 돌아본 적이 없다면 조심하시오, 맹목적인 열정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시키거나, 그 무게에 지레 도망칠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오, 친구, 명심하시오, 삶이 그리 무겁기만 한 것도 아니며, 역사가 그리 진지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오, 라고 말이다.
5.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견고한 모든 것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쿤데라야말로 진정한 사상가일지도 모른다. 세상과 삶과 인간을 가두는 그 모든 ‘견고한’ 것들 즉, 죽은 법과 시대를 역행하는 질서와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을 가로막는 모든 규칙들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쿤데라의 ‘사상’이 농담과 유머와 위트를 만나 뒤틀리는 순간, 그것은 ‘사상’이라든가 ‘철학’ 이상이 된다. 그리고, 여든을 바라보는 그의 ‘나이먹음’은 그러한 그의 농담같은 글쓰기, 뒤틀린 의미의 재창조, 바로크적 장난 안에서 비로소 빛을 발한다.
가을이 온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사색하기를 멈추었다. 모든 비쥬얼한 것들에 길들여진 우리는 나 자신의 사색보다는 타인의 사색을 ‘바라보는 일’을 더 즐긴다. 그것은 어쩌면, ‘사색’이라는 행위의 무거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쿤데라는 사색이라는 철학적 행위를 가벼운 장난이나 놀이처럼 만듦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무거운 것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고 있다.
이 가을, 쿤데라를 따라 역사와 정치의 근엄한 얼굴 뒤에 숨은 농담과 장난의 세계, 그 맨얼굴을 탐색하고, 사색해 보면서 삶의 속도를 늦추어 볼일이다, 그러나 아주 가벼이.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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