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화의 문화산책
하이퍼 리얼리티, 실재와 가상 사이에 드러누운 그 얄팍한 간극
서하진의 <책 읽어주는 남자>에 대한 단평
1.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사회를 두고 ‘하이퍼 리얼리티hyper reality’라는 극단적 정의를 내렸다.
하이퍼 리얼리티가 무엇인가? 그것은 일종의 모사물을 일컫는 단어로서 대상물과 사건들의 재현과 복사로 구축된 가상 세계를 의미한다.
탈근대 이전 산업사회의 핵심요소가 ‘생산’에 있었다면, 오늘날의 탈근대 사회를 유지하는 원동력은 바로 이 모사, 즉 ‘시뮬레이션simulation’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러나, 이 모사 즉, 시뮬레이션의 ‘질quality’에 있다.
산업사회 단계에서의 모사란 그야말로 ‘모조된’ 모사로서 ‘원본original’의 가치를 배가하는 시쳇말로 ‘짝퉁’ 혹은 ‘가짜’로 존재하는 ‘짝패counter-par’적 의미에 가가운 것이었다면, 탈근대 사회의 모사품은 원본을 ‘해체de-construct’하고 ‘넘어선beyond’ 지점에 존재함으로써 원본에 대한 가치의 상실을 유도하는 ‘재생산된 원본’의 개념에 가깝다.
결국, 탈근대 사회에서의 모사는 원본을 단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원본보다 더 원본적이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 리얼리티’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현대인의 욕망 또한 이러한 모사를 통한 원본 넘어서기의 방정식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
말하자면, 나의 욕망은 나라는 인간의 욕망 제조기를 통해 생산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 집단의 욕망을 모사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일테면, 멋진 청바지를 입고 싶다는 청년의 욕망도 그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생산된 것이 아니라, 청바지 산업이 생산해 낸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생산해 낸 가상 세계를 욕망하는 가짜 혹은, 타자의 욕망을 모사하는 욕망이라는 것.
이렇게 본다면, 원전과 모사품, 현실과 가상, 세계와 비세계 사이의 경계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며, 인간은 모사된 세계를 재모사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2.
서하진의 <책 읽어주는 남자>는 모사된 세계와 모사당한 세계, 가상과 현실, 소설과 비소설 등이 모사품과 원전의 역전관계처럼 혼효되어 상호침투하는 세계 앞에서 난감해 하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그’는 삼류대학 신참교수이자 당선 없는 가작으로 등단한 평론가다. ‘그’의 삶에 개입한 수많은 우연들에 의해 ‘그’는 결혼하고, 채희라는 애인을 소유하고, 교수가 되고, 평론가가 되어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번다.
우연히 뛰어든 문학판에서 우연히 써 본 평론으로, 참으로 우연하게도 표절로 드러난 당선작의 빈 자리를 차지하여 등단하게 된 것하며, ‘소설세계’의 심사위원장 자리를 또한 우연히 꿰차게 된 것이 바로 그것. 그리고, ‘그’의 이 우연성 넘치는 삶이 문학적 반전을 시작한 것은 ‘우연히’ 떠맞게 된 ‘소설세계’ 신춘문예 심사위원장을 떠맡게 되면서 부터다.
‘그’가 ‘춘원 이래 아직껏 해결되지 않은 고민’인 ‘우연성’이 남발되고 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통속적이고 고루한 신츔뮨예 출품 소설을 읽다가 내던지고, 무료함에 방안을 이리저리 뒹굴다 옛애인 채희를 만나 밀애를 나눈 뒤, 귀가하여 다시 읽어보는 예의 그 우연성이 남발된 소설 속의 이야기란 다름 아닌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가.
백화점의 아동복 코너를 운영하는 여자, 불륜에 빠진 남자에 대한 사랑으로 고집스레 낳은 아이의 죽음, 다시 만난 남자와의 밀회, 그리고, ….그리고, …어어어, 그것은 불과 한 시간 전 ‘그’와 ‘채희’의 밀회장면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어맛, 뜨거워라, 이런, 젠장할, 도대체 뭐가 현실이고 뭐가 가상인거야, 아무리 소리쳐 봐라. 대답할 자 있을지.
삼류대학 신참교수이자 삼류 평론가인 ‘그’가 어느날 갑자기 “소설 속에서 비로소 다가오는 아내가 그에게는 문득 낯설게 느껴”진다고 푸념하거나, “저건 무슨 소설에선가….., 아니지, 소설이 아니고…., 그래, ,포레스트 검프.에서 본 장면인데” 라고 헛소리를 중얼거린들 그리 이상할 것 없다. ‘그’에게 있어 아니, 우리 모두에게 있어 세상은, 그리고 삶은 이미 완벽한 모사이자 실재하는 가상이므로.
3.
베욤 레라츠 압트파기 모츠 타무츠- 내 얼굴을 보는 자는 정녕 죽을 것,이라는 의미의 이 문구는 어쩌면 신이 탈근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던지는 일종의 협박성 문구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가상인지, 무엇이 현실인지, 무엇이 모사인지 알려하지마라, 너무 많이 알면 다친다, 정도로 해석한다면 탈근대적 시대정신에 더욱 가까워진 번역이 될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진품적인 면모를 잃어가고, 인간은 원본과 진품에 대한 욕망을 벗어던짐으로써 세계에 대한 책임감조차 훌훌, 가벼이 벗어던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는가. 모사가 아무리 완벽하고 원본을 넘어선 지점에 서있다 하여도, 원본은 원본이라는 의미만으로 충분히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모사 또한 모사에 그치지 않고 진품이고자 욕망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방식이 다르더라도 같은 정신을 지향하는, 시작은 다르지만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동일한 일종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이자 신께서 선물한 인간정신의 고매함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모방본능이 창조한 하이퍼 리얼리티 속에서, 이 가상과 진실이 뒤죽박죽된 탈근대 사회 속에서, 진실과 진리와 원전을 향한 열정과 추구로 밤을 밝히는 것 또한 인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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