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데 까마귀 떼가 하도 시끄럽게 울어대어 무슨 일인가 하고 나가 보았다. 한쪽 날개에 상처가 있는 까마귀가 날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10여마리의 까마귀가 그 모양을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며 울고 있다. 그 애처로운 까마귀를 치료해 줄까 하고 잡으려니까 어찌나 놀라 도망을 가는지 오히려 상처만 더 줄 것 같아 그냥 두기로 했다.
방으로 들어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영희 할머니였다. 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할머니의 음성이 너무도 침통하여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에 꺼져가는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수화기를 들고 있던 팔에 힘이 다 빠져 나갔다.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가실 수가 있나. 할머니는 어쩌지. 서둘러 할머니 댁으로 향하는데 갖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내가 영희 할머니 할아버지를 알게 된 것은 10년 전의 일이다. 우리가 가든그로브로 이사를 온지 두달만인 미국 독립기념일이었다. 이웃 미국 할아버지가 오후에 자기네 마당에서 함께 독립일을 축하하며 즐기자고 했다. 그래서 불고기를 좀 해 가지고 갔더니 동내 분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헝가리, 이탈리아, 베트남, 일본, 한국 등에서 온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하며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그때 처음으로 영희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었다. 할아버지는 훤칠한 키에 백발의 머리가 관록이 있어 보였고 할머니는 자그마한 몸매를 가졌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웃는 듯한 눈매가 자상하게 보였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뒷밭에서 온종일 소일하느라 햇볕을 듬뿍 받아서 까맣게 되신 것이었다.
그 날 우리는 함께 핫도그와 불고기도 구워 먹고 아이스크림도 만들어 먹었다. 불꽃놀이도 함께 하며 이웃의 따뜻함을 즐겼다. 영희 할머니 할아버지는 외아들을 장가들여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에 보내놓고 외롭게 살고 계셨다. 손녀인 영희를 어렸을 때 잠간 데리고 길러서 그 아이의 재롱이 눈에 선하다며 많이 보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안 가시겠다고 버틴다는 말씀을 원망 섞인 듯 하셨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가 봤자 짐밖에 더 되겠나, 그저 조용히 우리끼리 사는 거지”하신다.
그 이후로 나는 가끔 맛있는 것이 생기면 같다 드리곤 했고, 대신에 할머니는 뒤뜰에 심어둔 상추며 호박, 오이, 고추, 가지 등을 가져오셨다. 또 시간이 나면 간이식당으로 두 분을 모시고 가서 아침식사를 함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아들 소식도 듣곤 했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는 무료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젊은 날의 추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젊었을 때는 모 은행에 이사로 계시던 지식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어도 좀 하시고 일본말도 잘하셨다. 그때 할아버지는 75세쯤 되셨다. 그렇게 우리는 5년 동안 같이 한 동내에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할아버지가 “우리 집 팔고 아들한테 가기로 했어, 마누라 등쌀에 견딜 수가 있어야지”라고 하셨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정말 이사를 가버리셨다. 할머니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아들 집에 가게 된 것은 축하해 드릴만한 일이었지만, 막상 떠나시고 나니 친부모를 떠나보낸 듯 허전했다.
그 후, 가끔 소식을 주고받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기에 다시 오고 싶어서 노인 아파트에 신청을 해 놓았다고 연락을 해오셨다. 그 2주일 후, 떠난 지 꼭 3년만에 롱비치 쪽으로 다시 이사를 오셨다. 떠날 때는 많은 짐들을 붙이셨는데 이번에는 트렁크 2개가 전부였다.
할아버지의 흰머리가 듬성듬성 빠지고 몸이 많이 말라서 그 전에 당당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늘어진 어깨가 가련하게 보였다. 별말은 안하셨지만 계면쩍은 웃음에 슬픔이 배어 있었다. 아들과 지내기가 좋았으면 여기 다시 오실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할뿐이다.
전보다 더 외롭고 적막한 삶이 다시 시작된 셈이었다. 이따금 할아버지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은 삶을 살며 밥만 축내고 있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하루에 몇 시간씩 양로병원에 가서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이제 소일거리가 생겨서 삶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셨구나 하고 한시름 놓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생겨버렸다. 지난 일을 회상하다 보니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와 아들 식구들 모두 말 한마디 없이 천근같은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할머니의 떨리는 가냘픈 손을 꼭 쥐어드렸다. 한참 만에 아들이 입을 열었다. “어제가 어머니 생신이었어요. 외식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버님이 몸이 불편하시다면서 쉬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끼리 다녀와 보니 주무시고 계셔 우리도 자버렸어요. 아침에 인기척이 없어 들어갔더니 벌써 운명하신 뒤였어요. 약을 잡수셨대요.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늦었어요, 정말 왜 그러셨는지 알 수가 없어요. 어쩌면 이럴 수가 있어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한다.
얼마 후에 할머니는 슬그머니 봉투 하나를 내놓으셨다. 눈물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편지를 든 손이 떨렸다. 할아버지의 근엄한 글씨체를 보는 순간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할아버지는 전혀 동요함이 없는 글씨체로 다음과 같이 써나갔다.
<여보 미안하구려. 까다로운 나를 만나 그동안 수고가 많았소.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얼마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다녀왔다오. 그 때 보호자를 다려 오라고 하기에 의사를 졸라서 내게 직접 알려달라고 했더니 간암이라고 합디다. 그 소리를 듣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많이 생각했소. 그렇지 않아도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던 내가 병까지 얻어 마지막을 또 당신에게 짐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오. 이제 내게 맡겨진 일을 다 마쳤고 지병을 얻어 소생할 가망이 없기에 이 길을 택한 것이니 너무 원망 말고 보내 주시구려. 그동안 정말 고마웠소.>
편지를 내려놓으며 맥이 탁 풀렸다. 과연 할아버지가 그렇게 했어야만 했을까. 아침에 울어대던 까마귀들의 울음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오는 듯하다. 까마귀들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내게 알렸던 것일까. 상처 입은 까마귀의 두려워 떨던 눈이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듯 크게 확대되면서 할아버지의 눈과 오버래핑 되어 다가왔다.
<정선희>
약력: 숙명여대 음대 졸업. 2006년 미주문학 신인상 수상(수필부문). 오렌지 글사랑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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