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전의 귀재’라는 칼 로브 백악관 비서실차장이 지난 주 사임의사를 밝히면서 2008년 대통령 선거와 관련한 그의 마지막 ‘신탁’을 내놓았다.
로브의 예언은 한마디로 ‘힐러리 필패론’이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힐러리 로댐 클린턴 상원이 선출될 것이나 “거칠고 고집이 센데다 약점 투성이”인 그녀에겐 본선 경쟁력이 없다는 주장이다. 물론 계산된 발언이다. 판세 읽기의 귀신이라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 민주당 지지자들을 상대로 노름판의 전문 도박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이른바 블러핑(겁주기)을 시도한 것이다.
로브의 ‘힐러리 필패론’은 빤히 들여다보이는 속내에도 불구하고 ‘여성 후보’에 대한 민주당 지지자들의 불안감을 들쑤시는 효과를 냈다.
로브의 지적대로 민주당 경선은 큰 이변이 없는 한 힐러리의 승리로 끝날 공산이 크다. 최근 실시된 일련의 지지율 조사에 따르면 힐러리는 최대 라이벌인 흑인 후보 배럭 오바마 상원의원을 두 자릿수 차로 멀찍이 떼어놓은 채 독주를 거듭하고 있다. 이 추세대로라면 힐러리가 주요 정당의 첫 번째 여성 대통령 후보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다.
그러나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성’이 아니라 ‘당선 가능성’이다. 로브의 블러핑은 바로 이 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힐러리와 오바마 가운데 누가 경선의 최종 승자가 되건 민주당은 ‘역사성’을 지닌 대통령 후보를 갖게 되지만 소수계에게 한없이 야박한 미국민의 ‘정치적 정서’에 지각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여성 혹은 흑인 후보가 본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로브가 던진 예언의 핵심이다. 상대를 흔들려는 블러핑답게 ‘헛심’이 배어 있으나 말짱 ‘헛말’은 아니다.
미국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헌법적 권리로 보장받은 것은 관련 조항을 담은 제19차 수정헌법안이 1920년 8월26일 비준되면서부터였다.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정치 참여도는 꾸준히 상승했지만 이들을 막아선 정계의 ‘유리벽’은 견고했다.
상원이 처음 개원한 1789년인 이래 이제까지 탄생한 여성 상원의원이 35명, 230여년간 배출된 여성 주지사도 29명이 전부다. 더구나 이들 29명 가운데 2명은 전임자의 얼마 남지 않은 잔여임기를 땜질하는데 그쳤다.
현재 상황도 그리 밝지가 않다. 108차 연방의회의 현직 여성 의원은 상원(정원 100명)에 14명, 하원(정원 435명)에 68명이 각각 포진하고 있고, 전국 50개 주 가운데 9개 주 주지사 공관만이 여성 차지다. 인구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흑인 ‘정치 성적표’는 이보다 더욱 초라하다. 우선 여성들보다 45년이나 늦은 1965년에서야 비로소 참정권을 보장받았다. 현직 상원의원은 오바마 단 한명이고 하원의원은 42명이 전부다. 역대 상원의원 수는 오바마를 포함해 총 다섯 명. 주지사는 2006년 중간선거에서 매서추세츠주 수장으로 선출된 드발 패트릭이 유일하다. 그와 피부색이 같은 ‘선배’로는 1990년 버지니아 주지사에 당선됐던 L. 더글라스 와일더가 있을 뿐이다.
미국 정계에서 흑인과 여성 정치인이 차지하는 수학적 비중만을 근거로 힐러리나 오바마와 같은 소수계 정치인이 미합중국의 44번째 대통령이 될 확률을 계산해 보면 ‘제로’에 가깝다.
“아직은 소수계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일 만한 분위기와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대부분 이 같은 추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
하지만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살아 움직이는 ‘민심의 흐름’이다. 강물을 이룬 표심 앞에서 ‘통계적 확률’이나 ‘역사적 한계’는 별 의미가 없다.
2008년 선거에서 민심의 강물이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 공화당의 백인 남성 후보가 승리할 수도 있고, 민주당의 소수계 후보가 백악관을 따 낼 수도 있다.
선거판에서 ‘게임의 룰’만 공정히 지켜진다면 그 어느 쪽이건 모두 ‘정답’이다.
‘역사적 핸디캡’은 승자의 신탁도, 패자의 변명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강규 / 국제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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