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청순한 동요의 울림이 마음에 젖어든다. 둥근 것은 좋은 것이라 예찬하면서 나의 젊은 날의 모나고 뾰족했던 성품도 이제 둥글게 둥글게
“어머, 둥글어졌네.” 몇 달째 씨름하고 있는 해바라기 그림이 거의 완성돼 갈 무렵에 내 입에서 탄성처럼 튀어나온 말이다.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해바라기그림이 된 것 같다.
화폭에 들어있는 해바라기가족을 소개해 보면 뒤로 토라진 것, 거꾸러진 것, 말라비틀어진 것, 살짝 봉오리 진 것, 아주 크고 환하게 잘 생긴 것, 그리고 혼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듯 서러워 보이는 것까지 다 모였다.
어디 그 뿐인가. 꽃 조각이 떨어져 나가 점점이 흩어져버린 것도 있고 남의 얼굴을 덮고 있는 것, 시작은 해바라기였으나 다른 꽃으로 변해버린 것에다 이파리들도 너울너울 각양각색으로 자리하고 있다. 잎인 듯한 꽃도 있고 꽃인 듯 한 잎도 있다. 남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귀를 쫑긋 하는 것도 있고 심드렁하게 뒤에 꼭 숨어 그림자만 내보이는 것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코발트블루의 하늘과 별, 서늘한 바람과 흐르는 구름 그 사이로 서로 뒤엉킨 입맞춤, 비록 모양이나 색상은 해바라기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난 듯하나 자기 신분을 유지하고자 한데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찡해온다. 무엇보다도 신통한 것은 그들 중 누구하나 뾰족한 것 없이 둥글다는 것이다. 작은 점 하나까지 꼭 있어야 할 곳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악기들과 흡사하다. 콘트라베이스처럼 덩치 큰 것이 있지만 바이올린처럼 작은 것도 있듯이 그 모두 다 귀한 것 아닌가.
밴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광기의 눈으로 그려냈던 강렬한 태양아래 노란 해바라기는 그대로 생명의 색이 되었었다. 꽃말은 “애모”, “그리움”이다. 찬란하게 밝아오는 태양의 신 아폴로를 사랑하게 된 물의 요정자매. 아폴로를 독차지하려고 언니 클리티에는 동생이 규율을 어겼다고 고자질하지만 사랑을 얻지 못하고 아홉 날 아홉 밤을 선 채로 아폴로만 바라보다가 발이 땅에 뿌리를 내려 한 그루 해바라기로 변하고 말았으며 오늘 날에도 하루 종일 태양만 바라보고 있다고 그리스신화는 전한다.
해마다 마당에 해바라기를 심고 나 또한 한 그루 해바라기가 되어 그들을 작품 소재로 삼는다. 부엌 한쪽 벽 전체에 그려놓은 해바라기로부터 캔버스나 타일에나 닥치는 대로 해바라기를 많이 그렸다. 첫 작품에 나타난 해바라기는 너무 정교해서 뾰족한 꽃잎들을 하나씩 세어가며 그린 것 같다. 십여 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여름에는 해바라기를 즐겨 그려왔다.
오랜 수련의 결과일까, 드디어 꽃 끝이 둥근 해바라기를 낳고 혼자 행복에 흠뻑 젖어있다. 작품명을 ‘둥글이 마을’이라고 지었다. 마을속의 가족들이 모두가 나를 쳐다보면서 헤헤헤 웃는다. 내 마음에 들도록 마구 자르고 키우고 수도 없이 색상을 바꾸어왔지만 왜 나는 이렇게 못 생겼느냐고, 아니면 왜 이렇게 작으냐고 따지고 대들지 않는다. 이웃이 좋아 어깨동무하면서 속삭이는 소리가 가만 가만 들려온다. 그들만의 우주 속에 특별한 숨결이 있는 듯 신선하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기위해 싸우지도 않고 키가 더 크기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이웃에 놀러 갔다 와서도 금방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네가 가진 것이 장대같이 크고 우람하다 해도 내가 가진 작은 것의 의미는 또 다르다고.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다면서 화목하다. 평화롭다.
<둥글이 마을> 동무들이 자기들처럼 둥글게 살라고 일러준다.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보며 서로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우리네와는 아주 다르다. 내게 있는 뾰족한 가시들이 남에게 큰 아픔을 주게 되고 그들을 힘들게 만들었던 시간이 부끄럽다. 비록 토라지고 배신하고 껄끄러운 이웃이라도 둥근 한 우주 공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영원한 이웃이 아닌가. 그림자처럼 뒤에 숨어있는 것이라 해도 그것으로 인해 그림의 품격이 높아지는 이치를 알면 어느 누구 하나 소홀히 대할 수 없는 것 같다.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춥시다… ” 맑고 청순한 동요의 울림이 마음에 젖어든다. 둥근 것은 좋은 것이라 예찬하면서 나의 젊은 날의 모나고 뾰족했던 성품도 이제 둥글게 둥글게 나이 들고 싶다.
<알리사 홍>
약력: 수필가·화가·재미수필문학가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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