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 편집국장
◈90년대 초로 기억된다. SBS-TV의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 중에 시골친구(말투로 보아 충청도 어느 농촌이었던 듯) 최양락과 김학래가 이래저래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었다. 잘난 척을 하는 김학래에게는 ‘나카무라’가 쥐약이었다. 아버진지 외삼촌인지 하는 사람이 일제 때 그 동네에서 악명을 떨친 나카무라와 절친했고 혹은 끄나풀쯤 됐고 그게 해방 후 두고두고 동네사람들의 조롱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최양락은 김학래와 이런저런 말싸움을 하다 막힌다 싶으면 나카무라와 김씨네의 관계를 들먹이며 말문을 막아버리면서 골탕을 먹이곤 했다. 한참 잘난 척을 하던 김학래는 이내 기가 죽어 부자연스럽게 딴전을 피웠고….
한(국)인들에게 일본 문제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상징하는 소극이다. 코미디라고 치부할 것도 없다. 실제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일본 얘기 잘못 했다가 신세 망친 사람들 많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AAM)이 설화전 일환으로 전시중인 역사왜곡 소지 설화족자 파동과 관련하여 기자가 최근 지난해의 독도영유권, 올해의 요코이야기 분쟁을 한데 묶어 본보의 입장을 정리할 때도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했다, 한마디 삐끗했다 김학래꼴 당하지 않으려고.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이 오해 저 오해 피하려고 조심하는 내 자신을 보며 일본 문제의 민감성 내지 폭발성을 새삼 절감한다.
◈그러나 할말은 해야 할 것 같다. 족자파동 와중에 불타는 애국적 민족적 열정에 비분강개한 한인들의 비난화살을 무수히 받은 AAM측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AAM측은 문제의 족자그림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등 한(국)인들의 시각을 상당폭 받아들인 오해방지용 보충설명문을 수정보완을 거듭해가며 붙여놓았다. 이제는 족자그림에 원용된 설화가 후세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구실로 작용했다는 등 보다 진전된 내용을 담은 설명문을 곁들일 예정이다.
적어도 기자의 상식으로는 매우 이례적이고 진지한 대응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전시회가 애당초 사료전이 아니라 설화전이고, 따라서 문제의 족자그림은 사료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으로 간주하는 AAM측의 입장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다 한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제3국의 박물관 사람들더러 왜 처음부터 그런 설명문을 붙이지 않았느냐고 논박하는 것도 우습고, 아예 철거하라고 우기면서 응하지 않으면 미주 한인사회는 물론 한국이 벌떼같이 일어나야 할 것처럼 주장하거나 선동하는 것은 더더욱 우스꽝스럽다.
이런 점에서 SF총영사관이 설화족자 전시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공개적으로 민심을 자극하지 않고 격식있는 서한을 통해 오해의 소지를 지적하면서 시정조치를 요구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고 본다. 화끈한 대응을 주문하는 이런저런 부추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같은 기조를 유지해온 것 또한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판단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AAM측이 용서 못할 대죄라도 저지른 듯이 적정량 이상으로 분기탱천한 모습을 보여준 이들의 뜨거운 열정과 세밀한 노고에 대해서는 평가하되 이들이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유도했던 방법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전에도 밝혔지만, 그렇다고 기자가 설화족자의 문제점을 가볍게 여기거나 AAM측이 이를 전시한 것 자체를 두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냉정하게 말해서 사실도 아닌 설화그림을 갖고 왜 난리냐, 너희도 옛날 설화그림 있으면 가져오라 전시해주마,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일 수도 있었을 AAM측이 우리의 지적을 수용하고 충분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만큼 또는 그 이상의 조치를 취해준 데 대해 일정수준 감사를 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혹 있을지 모를 이런 류의 파동에 대비해 한마디 더 해두고 싶다. 따질 건 따지되 정확하게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파동에서 몇몇은 설화족자의 역사왜곡 소지를 거론하면서 (일본이 아니라) 엄연히 한국에서 역사적 사실로 교육되는 내용들까지 깡그리 무시하고 억지주장을 하기도 했다. 역사왜곡 비판을 하면서 역사왜곡을 하는 꼴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신라침략에 관한 것이다. 듣기 거북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본의 신라침략은 사실이다. 일본역사책이 아니라 삼국유사 등에 나오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쓴 한국역사책에 나온다. 왜군이 금성(경주의 왕성)을 며칠동안 포위했는가 하면 내물왕의 아들을 볼모로 데려가기도 했다. 박제상(혹은 김제상)이 약 40년동안 보내주지 않는 왕자를 구하러 왜국에 갔다가 그냥 눌러앉으라는 꾀임에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노릇을 하지 않겠다”며 굶어죽었다는 저 유명한 이야기도 충절의 표상으로 곧잘 인용되지 않던가. 또 왜구의 노략질이 얼마나 심했으면 문무왕은 죽어서도 용왕이 돼 나라를 지키겠다고 바다에 묘(대왕암)를 만들어달라고 유언을 했겠는가.
어떤 이가 AAM측이 써붙인 영어 설명문 중 일부(the story of an invasion of Korea by a legendary Japanese empress, supposed to have taken place more than 1700 years ago)를 꼬집어 “침략 자체에는 ‘발생(take place)’ ‘이야기(story)’ 등의 ‘준 사실성’을 부여하면서 여황에게만 전설속의(legendary)’라는 허구성을 부여, 역시 일본의 신라침략의 비사실성을 명쾌하게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 것도 자칫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우선 ‘신라침략의 비사실성’ 운운은, 정말 우리역사를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면, 한국에서 교육되는 한국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take place나 story를 문제삼은 것은 영어모독 억지다. Take place 대신 happen을 쓴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문맥의 흐름상 story 대신 fiction이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할 것도 없다. 곧바로 took place를 쓰지 않고 supposed라는 추정적 단어를 끼워넣음으로써 이 설화에 대한 AAM측의 중립적 입장은 이미 반영된 것이다.
tsjeong@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