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모전 생활수기 당선작
‘I have confidence.” 억척스럽고 강한 목소리로 외치면서 진료실 문을 나왔다. 비통하고 절망적인 단어, ‘간암’! 남편에게 내려진 선고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조여 오면서 숨이 탁, 막힌다. 손발이 절절거리면서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소리를 질러야 하는 것인지 숨을 죽이고 주저앉아야 하는 것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절망감이 무성한 먹구름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내가 이럴 때가 아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감사합니다. 조기 발견을 했으니 축복이지요”라고 말하자 의사는 약간 놀란 얼굴로 나를 직시하며 “맞습니다. 병은 이런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로 말을 이었다. 나락으로 떨어져 내린 것 같은 공포에 쌓였을지라도 울지 않는 냉철한 여자로 지탱하고 싶었다. 가장을 해서라도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 의학 상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암환자를 간호해 본 일도 없으며, 암환자와 직면해 본 일도 없는 내가. 간암이라는 비정한 선고에 대한 항거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아니 남편으로 하여금 암을 극복시켜야겠다는 결심의 표현이었다. 이 어마어마한 위기 앞에서 나는 무엇부터 서둘러야 할까?
성급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강박감으로 마음이 급해졌다.
다음 날 외과전문의로 있는 아들이 주임교수에게 아버지의 간암을 알렸더니 “너의 아버지면 바로 내 가족이다. 가족부터 구해야 한다. 내일 아침 8시부터 제반 검사를 받고 수술 날짜를 잡자”라고 말하는 이 세계적인 분의 배려가 우리에게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힘을 실어주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다른 부위에 암이 퍼져 있지는 않은지, 수술에 임할 수 있는 건강 상태인지, 수없는 검사를 시작했다.
만일 그런 특혜가 없었더라면 예약을 하고, 기다리고, 그 수많은 검사를 따로따로 하느라 날마다 병원을 드나들며 얼마나 힘이 들고 시간이 지체 됐으랴?
개복을 할 것인가? 구멍을 뚫을 것인가? 고열로 처리할 것인가? 극냉으로 처리할 것인가? 신중한 상의 끝에 회복을 빠르게 하기 위하여 구멍을 뚫는 방법에 극냉법을 택했다. 이 낯선 땅에 와서 생명을 위협받는 기로에 선 참담한 처지에서 누린 특혜는 천운이라 할 만했고 진심으로 감사했다. 형제 친지들께는 일체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걱정을 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차 수술로 우선 선명하게 나타난 1센티 지름이 되는 암 부위는 처리되었으나 점처럼 적은 것들이 커짐과 동시에 다른 장기로 전이될 것을 염려하여 간이식을 하기로 결정했다. 간이식 신청을 해 놓은지 8개월이 되던 어느 추운 겨울 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에 따갑게 전화벨이 울렸다. 친절하고 따스한 목소리로 “Your donor is here” 이식할 간을 얻었으니 즉시 병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우리는 이름 지을 수 없는 긴장감으로 묵묵히 옷을 갈아입고 미리 꾸려놓은 준비물을 들고 차에 올랐다. 한밤중의 질주는 우리에게 생명을 걸어야 할 대결전의 장을 향하는 순간처럼 엄숙했다. 미지의 상황에 대한 초조와 불안, 행을 비는 간절함, 만일의 경우에 대한 전율 섞인 현기증, ‘심호흡을 하자. 무사히 좋은 결과가 오리라’고 스스로 달래며 안심하려 안간힘을 썼다.
한 시간 후 병원에 도착해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수십 가지의 서류에 사인을 하는 등 수술실에 들어가기까지의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나니 허옇게 날이 새고 있었다. 성공적인 수술이 될 것을 믿고, 다짐하고, 기도하면서 수술실로 들어가는 남편과 손을 꼭 잡았다. 미리 예약된 환자 수술 때문에 미처 병원에 도착하지 못한 아들은 전화로 마치 삶의 마지막 인사를 하듯이 가슴 저리게 아빠에게 “I love you”를 반복하며 애틋하고 질긴 혈육애를 토해내고 있었다. 아빠의 수술 소식을 듣고 코네티컷주에서 공항을 향하여 달리는 차 안에서 “아빠, 저 지금 아빠에게 가고 있어요. 무사히 이겨내 주세요. I love you.” 전화선을 타고 오는 정어린 딸의 간구 등, 잘 될것을 믿으면서도 큰 수술 앞에서 염려스럽고 공포스러운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수술실 문이 굳게 닫히고 그 앞에 덩그러니 서서, 세상을 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과 하나 되어 서 있는 나를 보았다. 진혼의 구도자를 붙들고, 애걸하는 내가 거기 있었다. ‘안심하라. 고뇌 속으로 뚫린 터널 저편에 햇살이 보이지 않느냐?’ 내 가슴의 심연에 반석처럼 서 계신 나의 하나님이 주신 신뢰감이 나를 붙잡아 세웠다. 여섯 시간이 지난 후 든든하게 믿음이 가는 얼굴의 간호사가 약간 흥분된 어조로 “Very successfully done. Congratulations”라고,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후ㅡ답답하게 조였던 가슴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말을 만배로 확대하여 받아들이고 싶었다. ‘내 남편이 살아났어요’라고. 세상에 소리치고 싶었다. 남편이 거미줄 같이 수십개의 튜브를 꼽고 징만큼이나 크게 부은 얼굴로 수술실에서 나왔다. 부처님 손처럼 커져버린 그의 손을 만져보았다.
‘아’ 따뜻하다ㅡ살아있구나! 내 아픔과 염려를 감당해 주신 전능하신 분께, 내 남편에게 간을 선사하고 간 미지의 영혼에게, 그리고 피 말려 청춘을 불사르며 공부한 실력으로 이 수술을 담당한 의사에게 한없이 감사했다. 감사를 외치다가 목이 타는 갈증으로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이는 예상외로 회복이 빨라 일주일도 되기 전에 퇴원했다. 다시는 병에 걸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없이 평안했고 회복이 잘 되어, 활기찬 얼굴로 골프를 치러 나갔던 어느 날 예정보다 훨씬 빨리 귀가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떨리고 답답해서 서둘러 왔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그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드디어 가슴에 모니터를 달아야했다. 심장의 비정상 떨림을 즉시 병원으로 전달하여 그 위험도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3개월을 달고 그 진동을 여러 번 연락했으나 미세한 것이라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한 달이 되던 어느 날, 남편은 내가 운영하고 있는 회사의 월말 세금보고를 좀 도와주겠다고 나왔었다. “여보 여기 좀 와 봐.” 불평 섞인 볼멘소리도 아니고, 기쁜 일로 부르는 윤나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며, 몇 십년을 같이 살았어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어감이었다. 내가 작업을 하고 있던 디자인 테이불에서 10미터 쯤 떨어진 거리를 천천히 걸어서 오피스에 들어갔다. 소파에 누워서 “여보, 가슴. 가슴” 하며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앗, 이건 급하구나.’ 응급차를 부르는 것보다 내가 직접 가는 게 빠르다는 판단으로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서 인근 병원으로 직행했다. 응급실 문 앞에서 “여보, 이제 멈추었는데 그냥 가지.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라고 했다. “이 눈밭에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다니요. 이럴 때는 여자가 좀 고집을 부려도 되는 거예요” 강권을 행사해서 병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느 병원과 같이 환자복을 입히고 체온, EKG, 혈압, 맥박검사를 하고 침대에 눕혔다. 이런 시시한 기초검사나 받자고 누워 있을 필요가 없다고 불평이 대단했다 . 어서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 의사에게 지금 저 환자상태가 어떠냐고 살짝 물었더니 언제 심장마비가 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어서 심장전문의를 찾아 다른 병원으로 옮기란다. 환자의 의견을 묵살하고 밀고 가는 용단이 필요해. 잘 했구나. 팽팽하게 긴장하여 그들이 지시해 준 병원으로 옮겼다. 심장혈관이 90%가 막혔다는 것이다. 의사를 선택하고 수술에 임했다. 어느 수술이라고 다르랴? 기다리는 가족의 애탐은 차라리 본인이 환자이기를 바랄만큼 초조하다. 6시간이면 족하다는 수술이 8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공기에 산소가 모자란 것처럼 숨이 답답하고 입은 사막처럼 말라 혓바닥이 콩크리트 바닥처럼 굳어지고 껄끄럽다. 애 간장이 녹아서 물이 되지 않았나 싶었다. 드디어 의사가 나와서 설명을 했다. 바이패스 수술 이외에 리듬을 조절하는 수술(maze) 한 가지를 더 해야 했다는 것이다. 예상 외의 수술을 더 했다면 환자가 얽히고설킨 자신의 여러 병에 너무 실망할 것 같아서 알리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이번 수술도 잘 되고 회복이 순조로웠다. 심장 틈으로 희망의 새 뿌리가 돋아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고, 말끔히 나았다고 만세를 부를 만큼 호들갑을 떨었다. 모두들 내부를 하나하나 수리했으니 백년은 살겠다고 웃음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렇게 수술을 받고 나니 그가 날마다 복용해야 하는 약 가지 수가 10가지가 넘었다. 이제 더 이상의 병은 없으리라 믿으며 꼬박꼬박 약을 복용하고, 병원에서 지시한 대로 운동을 하고, 그의 투병정신은 가히 탄복할 만큼 훌륭했다.
그렇게 태평가를 부르던 중 수술한지 9개월에 접어들면서 발과 다리가 퉁퉁 부어오르는 이변이 일어났다. 어찌된 영문일까? 드디어는 배까지 부어올라 뒤척이기도 어렵고, 걷기는 더욱 어려우며, 신을 신을 수도 없게 되었다. 배가 부어오르는 것은 치명적인 위험 신호라는 말이 생각나, 가능하면 그런 말을 안 하려 애썼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불길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피했다. 배가 그렇게 부었으니 무얼 먹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정성을 들인 음식이라도 못 먹겠다는 것이 그의 말 전부였다. 나는 점점식사 준비하는 일이 싫어지고 요리에 자신을 잃었다. 결국 심장 발부가 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는 옆구리에 바늘을 꽂아서 물을 빼야 했다. 푸른 물감을 푼 것 같은 물을 한 번에 7갤런씩이나 빼냈다. 처음에는 3주에 한 번씩 뺐으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그 와중에 염증이 생겼을 때는 뺀 물색이 와인색이 되어 나오고, 폐렴이 온다던가, 황달이 든다던가, 걷잡을 수 없는 증상으로 치닫는다. 그 무렵 남편과 동연배들의 건강한 얼굴을 대할 때는 마치 빛나는 보석을 본 것처럼 부러웠다. 그이는 왜 이렇게도 가지 가지의 병에 시달려야 하는가? 가엽기 그지없었으나 그이 앞에서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남의 건강을 부러워할 때가 아니라 그의 강인한 인내력을 칭찬해야 할 때다’라고 다짐했다.
이번에는 헐거워진 심장 밸브 때문에 물이 새는 것이니 소의 심장막으로 대치하는 심장 밸브 수술을 하게 되었다. 체험의 밀도가 더해지면 좀 대범해지고 인내도가 강해져야 할 터인데 여러 번의 수술이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조건들이 내재해 있으리라는 염려로 초조하고 긴장되는 마음은 더 가중될 뿐이었다. 환자 가족이 대기실에 앉아 있는 일은 고통을 돌 위에 새기고 있는 것처럼 견디기 어렵다. 선별한 명의인데 당연히 성공적일 것이라고, 보증수표라고 믿으면서도 걱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여러 번의 대수술이고 보니 갑자기 당이 올라가고, 신장기능이 나빠지고, 혈압이 올라가고, 맥박이 빨라지는 등, 어려운 문제들이 줄줄이 야기되고 있었다. 이 수술 또한 잘 되었다고 좋아했으나 퇴원 후에 또 다시 입원하여 호흡곤란으로 병원이 떠들썩하게 소란을 일으키는 등 우여곡절을 넘고 넘어서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그러나 남편의 몸 안에서는 조용히 다시 암울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식된 간을 잇는 연결부분의 관이 좁아져서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그 부분에 플래스틱을 넣어 관을 넓혀주는 ERCP라는 시술을 3개월 간격으로 받아야 했다. 그의 몸 안에는 남의 간, 소의 심장막, 철사, 장에는 플래스틱, 네 가지의 새로운 것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육체에 인위적인 것이 삽입되어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현대의술의 혜택을 받을 수 있음에 한 없이 감사하는 생활이었다. 그는 투병의 용사라는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365일 거의 매일이라 할만큼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다. 수시로 MRI, 캐스캔, 바이업시, 코모딘태스트, 혈액검사, 스트래스태스트, 울트라사운드, 매번 한 주먹 만큼의 약을 하루 세 차례 복용하는 일, 검사 결과에 따른 약 양의 변동 등 상의해야 할 의사가 각기 다르고, 만나야 할 간호사가 다르다. 책가방 만한 약가방이 세 개나 된다. 약 이름과 함량을 기억하고 복용하는 시간조정 등 초인적인 노력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이런 투병 능력을 보시고 이 역경의 기회를 주신 것일까? 그러나 자연의 순리를 넘어서 행해지는 과정, 예를 들어 플래스틱을 삽입했을 경우 그 부위에 박테리아가 몰려든다던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따른다. 이번에는 여느 때와는 다른 심각한 박테리아 감염이 왔다. 박테리아와의 싸움은 치열했다. 6주 동안 4시간 간격으로 세 가지의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한 차례의 주사를 맞고 처리하는데 그럭저럭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한 차례를 맞고 좀 쉴까 말까 하면 또 다음 차례가 오니, 잠은 그 사이사이를 끼어 다니면서 한 시간씩 자야 한다. 그렇게 힘겨운 6주간의 고비를 넘기고도 박테리아가 완전 소멸되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엔 다시 심장을 열고 그 감염 부위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박테리아는 박멸되었다. 대형 수술을 한 환자에게 감염은 치명적인 공포다. 더구나 남편처럼 간, 심장, 장 등 여러 수술 경력을 가진 사람은 그 감염 부위를 찾아내는 것만도 대작업이다. 여러 형태의 병은 끊임없는 환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병은 그의 친구였으며 병과 어깨동무를 하고 병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해 잇달아 생기는 감염을 막기 위한 방책이 필요했다. 드디어 플래스틱을 빼고 그 부위를 잘라낸 후 창자와 바로 잇는 바일닥트 수술을 하기로 했다 .다섯 번째의 수술이다. 그때마다 코네티컷에서 두 자매를 기르고 있는 딸은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달려 왔고 아들은 환자 수술을 마치고 부랴부랴 뛰어오곤 했다. 딸의 경우 아이들을 데이케어에 보내는데 폭설로 갑자기 학교가 문을 닫게 되면 한 아이는 이웃에 맡기고 한 아이는 사위가 데리고 출근하여 아이를 등에 업고 환자 진료를 해야 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토록 오지 말라 말려도 아버지 수술기간에 딸이 옆에 있도록 배려하느라 비행기표를 먼저 사들고 온 사위의 후덕함에 큰 위로를 받기도 했다. 이 다섯 번째의 수술 후에는 너무 여러 번의 매스자국이라 상처가 잘 아물지 않아서 치유기간이 좀 길었으나 또 극복했다. 하루치의 땀을 흘리면 그 값어치만큼 소생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 우리 가족은 아빠의 하루가 더 나빠지지 않으면 더 좋아지고 있는 것으로 믿기로 했다. 그이는 때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표현을 했다. 시한부 인생을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을 고단하게 만드는 병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둠을 통해서 밝음으로 갈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로 살자고, 나는 과격하리 만큼 단호한 언어로 그이의 그런 표현을 단속했다. 역경은 역경만이 열 수 있는 열쇠가 있다고, 병과 싸워 이기는 것은 그 열쇠를 찾는 것과 같다고, 그이도 수긍하고 인정했다. 그이의 오랜 투병생활이 삶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는 시간을 안겨주곤 했기 때문에 남편은 작은 일에도 감사했다. 5년에 걸쳐 다섯 번의 수술이 겹치고 매일 30알이 넘는 약을 복용하며 사람의 경지를 넘어섰다 할만큼 철저한 자기관리를 한 덕에 건강이 회복되고 있었다. 기적 같은 회복양상이었다. 이제야말로 완쾌되었다고 쾌재를 불렀다. 알래스카 크루즈를 가고, 한국을 방문하여 형제들과 전국을 누비며 즐겼고, 오페라를 보러 다니면서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하고 깜짝 깜짝 놀라기도 하고, 때로는 겁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
“여보 하늘을 나르는 피터 팬처럼 살자구요. 우리 궁합이 노년에는 둘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산대요.’’ 나는 그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코네티컷 딸네 집을 거쳐 플로리다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 올 요량으로 여러 장의 비행기표를 사들고 시카고를 출발했다. 안개 같은 세우가 기분 좋게 뺨에 느껴지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딸네 집 뒤뜰에서 캠프파이어를 했다. 동쪽 하늘에 깨진 금 반지 같은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훈훈한 크리스마스이브는 너무나 멋있는 낭만이 흐르는 밤이었다. 이글거리는 불에 밤을 구웠다. 그러나 그날 밤 그이는 딸이 좋아하는 군밤을 까서 딸 입에 넣어주는 평소의 자상하고 따뜻한 아빠가 아니었다. 배가 살살 아프고, 춥고, 만사가 싫다는 것이다.
소화불량으로 알았으나 다음날 혈압이 41~56으로 떨어지며 경기를 했다. 박테리아 감염이 또 온 것이다. 결국 사위가 근무하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고 사위가 담당의가 되어 치료를 받게 됐다. 중환자실에 누워 정성으로 돌보아주는 간호사들에게 한없이 고마워했고, 사위의 극진한 정성을 받으며 흐뭇해했다.
“여보, 나는 지금 간다 해도 여한이 없소. 당신이 애들을 잘 길러서 아들, 딸, 사위, 이 땅의 엘리트로 살고 있지 않소! 어느 제왕인들 다섯 번의 수술에 나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에 의미를 붙이고 감사했다. 드디어 박테리아가 섬멸되어 위급상태가 진정되자 시카고로 돌아와 비행장에서 그 길로 다시 입원을 했다 .약간의 뒷 치료를 하고 2~3일 후면 퇴원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퇴원 준비를 하고 나면 간 수치가 올라가거나, 알카포가 올라가는 등, 날마다 목마르는 애탐이 있을 뿐이었다. 성급하게 퇴원하여 또 병원으로 달려가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하고 달래며 ‘병과 남편과 나, 셋이 친구되어 세월을 등에 지고 간다’는 한 토막의 시를 썼다. 병과 어깨동무하고 걷자. 병이여 때로 언뜻 언뜻 푸른 하늘도 보여주고 맑은 바람도 마시게 해다오. 여태껏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오뚝이처럼,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날 것을 굳게 믿었다.
그는 너무 여러 번 이웃들을 놀라게 하고 기도 받고 위로받은 빚진 자라는 죄송함 때문에 더 이상 입원을 알리기 싫어했다 .우리를 아껴주시는 분들의 꽃이며 카드며 더 이상 받을 면목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충분히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한 동감이었다. 오늘 내일 하는 기대 속에 어느덧 입원 5주가 되었다. 그 날은 병실에 들어섰을 때 남편이 유난히도 하얗게 핏기 없는 얼굴로 지쳐있는 듯 했고 눈 뜨기도 힘든 양 숨을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이가 나를 기다리느라 환자 특유의 외로움에 시달린 모습은 아닐까? 목이 메었다. 약해졌구나. 가슴이 선뜻했다. 잠을 깰세라 가만히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그가 조용히 눈을 떴다. “여보 죽은 탄수화물뿐이니까 두부국을 끓여 왔어요” 두부를 몇 점 입에 떠넣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만져 보았다. 내 육체의 일부 같은 낯설지 않은 체온이 느껴졌다. “산다는 것은 여행이라 했어요. 여행 중 지금이 힘든 고비를 지나는 중인가 봐요. 당신이 참고 견디는 고통에 걸맞게 회생이 올 거예요. 우리는 시간과 마음을 나누는 동반자인데, 좋은 일 앞두고 있잖아요. 우리 아들 약혼, 결혼, 함께 경사를 즐겨야죠. 어떤 어려움이라도 헤치고 일어나야 해요” “그래야지” 우리는 그렇게 속삭이듯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어쩐지 그이가 피동형으로 누워있는 것같은 안타까움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언제 활기차게 일어나서 맛있는 식당을 섭렵하고, 여행을 하고, 친구들과 신나게 웃어볼까? 파티에 가면 맨 먼저 내가 좋아하는 칵테일을 들고 나를 찾는 사람, 여행 중 이른 아침이면 향긋한 커피를 사들고 들어올 때 그에게서 풍기던 새 아침의 신선한 바람까지는 너무 과분하고 어서 집에 갈 수만 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뿐, 새털같이 많은 날이라지만 삶은 유한한 건데, 그리고 하루가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건데 등등 독백을 하면서, 어서 퇴원할 수 있기만을 간절히 고대했다. 다음날 병실에 들어서니 전에 없었던 가느다란 산소공급선이 코에 끼어져 있었다. ‘이게 웬일?’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내 환자 때문에 지금 아빠에게 못 가겠어요. 아빠의 호흡이 좀 곤란해서 중환자실로 옮겨 달라했어요”. 암담한 기분을 누르고, 그가 다시 일어날 거라는 확신을 갖자고, 지나친 염려는 에너지 상실이고 나쁜 증조를 가져온다고, 곧 호전될 거라고, 애써 병세를 수월한 방향으로 해석하며 중환자실로 따라갔다. 캄캄해서야 아들이 왔다. 큰 산소통을 가져오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고 전보다 몇배 큰 호tm가 매달린다. 그때 나는 종일 굶고 너무 지쳐서 김빠진 풍선처럼 늘어져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엄마는 어디 갔니?” 하고 남편이 나를 찾았다. “여보 나 여기 있어요.” 급히 그의 곁으로 갔다. “나 아빠와 더 말하고 싶은데 얼굴에 이런 것 씌우면 어떻게 해” “좋아지면 곧 다시 풀어요”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그 일을 끝내고 아들 집으로 들어서니 새벽 2시다.” 엄마는 좀 주무세요. 나는 급한 환자가 있으니 수술해 주고 와야겠어요.” 아빠에 대한 걱정, 자기 환자에 대한 책임감, 아들의 피곤함을 염려해야 하는 엄마로서의 애통함이 짙게 짙게 가슴에 번져갔다. 세상에 수많은 직업이 있지만 인간의 생명을 직접 다루는 외과 의사라는 직업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늘의 명을 받고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환자에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텐데 하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미어졌다.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엄마 어서 병원으로 가야 해요. 누나도 오늘 올 거예요” 아들은 급하게 재촉한다. 여명 속을 달리는 차안에서 우리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주고받을 수가 없었다. 나는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부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소리도 눈물도 없는 울음을 삼키며 심장이 떨리는 공포로 오직 기적만을 꿈꾸고 있었다 .이건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상황이다. 새벽하늘을 우러르며, 살아 있음의 신비와 감사함을 모르고 살았던 것, 그의 죽음이 오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정신을 잃어가는 나를 붙잡기 위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빠 병이 호전될 줄로 믿고 갔던 딸이 다시 왔다. 기다리던 딸이 왔으니 갈 길을 서두른다는 것일까? 갑자기 심장박동이 약해지고, 간에 충격이 오고, 신장에 이상이 오고, 완전히 퇴치됐다고 믿었던 박테리아가 다시 기승을 하는 데는 모두 놀랐다. 혹, 장이 부패했을까 하는 의심을 가졌다. 그렇다면 그 부분만 도려내는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장을 열어보아서 장 전체가 부패해 있다면 하나마나한 수술이며 환자만 고생을 한 번 더 시키는 경우가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나의 의견은 달랐다. 두부를 먹여준 것이 겨우 24시간이 넘었을 뿐인데 어떻게 그토록 부패했겠는가? 1%의 가능성이라도 붙잡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내 의견대로 장을 열어보았다. 내 예상대로 장은 멀쩡했다. 그러기 때문에 원인은 더욱 모호해졌다. 수술을 하고 난 그의 얼굴은 다시 무섭게 붓고 일그러져서 나왔다 .결국 여섯 번의 수술을 한 것이다. 승산 없는 수술을 한 번 더 하느라 수선을 피웠지만, 후회가 없었고, 최선을 다 했다는 후련함이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최후를 암시하고 있었다. 절망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생은 신의 것이다. 그이가 자기 삶은 만족하였으니 울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했지만 오열로도 이루지 못하고 통곡으로도 치유 못할 아픔이 폭풍처럼 덮쳐왔다. 그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고 캄캄하고 추운 길을 혼자 떠나는 것일까? 아니, 하늘가는 꽃길일 것이다. 두 아이와 셋이서 그를 얼싸안고 차례로 얼굴을 비비고 손발을 만지면서 우리의 즐거웠던 추억을 반추하며, 웃고 울고 기도하면서, 그를 보내는 마지막 서너시간을 가슴 저리는 슬픔의 경련으로 엮어갔다.
우리는 쉬지 않고 환자에게 말을 했다. 언제나 따뜻하던 아빠, 우리의 가족여행은 언제나 좋았어요. 낚시하던 호수, 그 웃기던 피자집, 그리고 한글학교, 댄싱 클래스, 피아노 레슨, 레슨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시던 내 아빠, 주말 치즈케익, 일요일 아침이면 아빠가 들려주시던 클래식 뮤직, 잊지 못해요.사랑하는 내 아빠, 내가 풋볼선수로 뛸 때 자랑스러워하시던 아빠, 전교 회장으로 당선했을 때 기뻐하시던 아빠, 아빠 회사에서 미국인들이 부러워할 만큼 으쓱했다고 좋아했지요. 내 환자들 앞에서 아들 자랑하면 안 된다고 겸손하려고 애 쓰시던 아빠, 훌륭한 내 아빠, 땡큐 땡큐. 여보 당신은 세상에서 최고의 남편이었어. 언제나 그림자처럼 내 곁에 있었고 오직 하나의 나의 남자였으며, 당신과의 모든 시간은 행복했어요. 여보 나는 당신을 보내지 못해요. 보내지 않아요. Never say goodby never say goodbyㅡ그는 증발하듯 사라져가고 있었다. 방안 가득 보이지 않는 허무와 좌절의 해일이 밀려들고 그 해일에 떠밀리며 나는 통곡했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는 없는 것, 누구나 가는 길, 그 유한한 삶의 종점에서 감사함을 느끼고 만족해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는 갔지만 그가 남긴 말은 귀하게 살아 있다. 그는 열심히 살았고 자기 병 치료에 최선을 다했고 주위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여한이 없다고 만족해했다. 그의 삶과 죽음의 자세에 경의를 표한다 .이제 그는 이 지구상에 없다. 그러나 더 크게 내 가슴에, 그리고 내가 가는 곳 어디에나 있다. 아침햇살에, 책갈피에, 산책로에, 커피잔 앞에, 달리는 차 안에, 고운 석양에, 등나무 밑 벤치에….
“당신 아직 할 일이 남았소 .우리 사랑하는 아들딸의 영적 지도자로 소중한 일 감당해 줄 것을 믿소.”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 당신의 바람을 내가 어찌 잊으리ㅡ여생을 사랑하며 최선을 다 하고, 그리고 당신 곁으로 갈게요.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끝>
입상 소감
어둠 다음 찾아오는 밝음이
멀리 한국에 나와서 뒤늦게 당선 소식을 전화로 들었습니다. 기쁨인지 반가움인지 어리둥절합니다. 속 시원히 웃어지지도 않고 소리 질러 울 수도 없는 나의 가슴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고나 할까요. 저는 항상 거짓이 없는 글을 쓰고 싶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다, 가슴 속에 쌓인 것 퍼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무슨 재주로 남편을 보낸 아픔을 남이 느낄 수 있도록 쓸 수 있을까? 천부당만부당한 욕심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써 놓고 부끄러워 웃었습니다. 수기를 수기답게 쓰기 위한 공부도 퍽이나 모자라다는 것을 느끼면서 썼습니다. 아픔을 지그시 참을 줄도 알아야 하고 그 뒤에 다가오는 광명을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며 내 영혼이 더 성숙해 져야 한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어둠은 어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둠 다음에 찾아오는 밝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다”라고 말한 소설 <혼불> 작가 최명희씨의 말을 기억하며 당선소감을 쓰고 있습니다. 남편을 잃은 암담함에서 글을 쓰는 기쁨으로 내 삶을 승화시킬 수 있다면 어둠과 밝음을 공존시키고 있다 할 수 있을는지요.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생수처럼 신선한 언어를 만들어내 너와 나의 심금이 울어 시를 포옹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고 더욱 참신한 문학정신을 찾아야겠습니다. 끝으로 나에게 용기를 주며 사랑과 성의로 밀어준 분과 서투른 저의 글을 뽑아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숙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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