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갖는 정원훈 전 행장
‘나는 그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한인 은행계의 대부 정원훈(87) 전 행장이 한 평생 그림과 벗하며 살아온 인생을 데카르트식으로 요약하면 이런 문장이 될 듯하다. 한정된 세월을 살다 이우는 ‘팜 플라워’(palm flower)도 노 은행가의 손끝을 거치면 ‘영원한 목숨’으로 다시 태어난다. 화폭 안으로 들어와 많은 사람의 눈과 가슴을 즐겁게 해 주는 ‘작품’이 됨으로써. 아마추어라지만 그는 노령인 지금도 한 주에 2~3번은 그림 삼매경에 빠져든다. 한 번 붓을 잡으면 3~4시간은 보통이다. ‘포기’를 밥 먹듯 하는 젊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열정이다. 이런 그가 무려 60년간 생업의 터전이었던 은행에서 17일부터 전시회를 갖는다. 10월26일까지 다운타운에 있는 퍼스트 스탠다드 뱅크(FSB) 갤러리(1000 Wilshire Bl. #100)에서다. 감회가 아니 깊을 수 없다.
정원훈 전 행장은 자신이 그린 팜 플라워를 보여주면서 “은행계 후배들을 비롯, 많은 한인 가족들이 이번 전시회에 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행장 두루 거친‘금융계 대부’
구순을 바라보는 요즘도
주 2~3번씩 ‘열정의 붓질’
17일부터 FSB 갤러리서
유화·서예 등 30여점 선봬
“어느날 구본태 FSB 행장이 전화를 걸어와 ‘선배님, 저희 은행 갤러리서 전시회 한 번 하지죠’ 하더군요. 선뜻 응했습니다. 서툰 솜씨지만 금융가 후배들과 감동을 나누고 싶어서요.”
본인은 겸허하게 말하지만, 1974년 이래 남가주한국미술가협회, 1991년 이래 미주서예협회에서 회원 및 이사로 활동해 온 그인 만큼 작품이 취미 수준을 넘어선다.
이번에 선뵈는 작품은 유화 29점과 서예 7점 등 총 36점. 대부분 2001년 은퇴한 이후 작업한 것들이다. 그의 화폭에서는 태평양이 그리움처럼 넘실거리고, 푸른 산이 만년 침묵 속에 서 있고, 난이 단아한 자태를 뽐내는가 하면 해바라기가 생에 대한 사랑을 뜨겁게 노래한다.
그의 인생 궤적을 보여주듯, 디자인에 본인 아이디어가 많이 들어간 가주외환 및 새한, 본인이 직접 고안한 한미, 아시아나 은행 등의 로고로 이뤄진 그림도 있다.
평북 철산 태생인 정 전 행장이 은행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지금으로부터 66년 전인 1941년. 경성고상(서울대학교 상대의 전신)을 졸업하고 입사한 만주중앙은행이 긴 금융인생의 출발점이었다. 해방 이후 귀국하던 길에 그는 “사나이로 태어나 주판알만 튕기며 살지는 않겠다”고 결심했으나 ‘배가 출출해’ 결국 저축은행(제일은행의 전신)에 입사했고, 1950년에는 한국은행으로 스카웃됐다. 한은 외환과에서 일하다 부서가 독립해 한국외환은행으로 탄생하던 67년 승선, 72년까지 전무로 일했다.
그후 사표를 던지고 미국으로 왔으나 인연의 줄은 질겼다. 한인사회 최초로 설립되는 가주외환은행의 행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1973년 받은 것이다. 그후 한미, 새한, 아시아나 은행(북가주) 등의 초대 행장을 두루 거쳤으며, 81세에야 오랜 은행가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화가로서도 UCLA와 오티스 아트 칼리지에서 미술수업을 받고 개인전도 여는 등 불꽃처럼 살아왔다. 96년과 2004년에는 한국의 하나은행 갤러리와 포스코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갖기도 했다.
“한국에서부터 그림을 그렸지만 접대 등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지 않는 미국에 온 후에야 비로소 창작혼을 본격적으로 불태울 수 있었지요. 북가주에 있을 때는 주말마다 바닷가에 나가 종일토록 그림을 그리다 하이웨이 280을 타고 귀가하곤 했어요. 하늘에 뜬 달을 보며 ‘아, 참 좋구나. 저 달을 사별한 와이프도 보고 있겠지?’ 라고 생각하기도 하면서….”
정 전 행장의 이번 전시작 중에는 ‘귀천’(歸天)이라고 쓴 한문서예도 있다. 동심이 얼굴에 어려 있는 그는 하늘 구름만 보아도 ‘참, 이쁘다’며 감동을 받는단다. 삶을 따스하게 바라보면서 ‘행복한 붓질’을 통해 소풍처럼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의 모습이 천상병의 시 ‘귀천’의 마지막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전시회 리셉션은 17일 오후 6시에 열린다. 문의 (213)200-8829 큐레이터 카린 김씨
정 전 행장의 서예 작품 .
<글·사진 김장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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