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한국선거에 있어 ‘북풍’만큼 위력을 가진 변수도 드물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틀림없는 약효를 자랑했던 이 인위적인 바람은 민주화가 자리 잡으면서부터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예외없이 서릿발이었던 한겨울 삭풍에서 남북관계 해빙과 함께 따뜻한 훈풍으로 바뀌기도 했고 기대와는 달리 잠시의 미풍에 그친 적도 있었으며 방향 바꾼 역풍으로 되몰아치기도 했다.
지난 연초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는 선거와 북풍의 역사를 정리하며 ‘70년대까지 선거철은 간첩단 사건 발표의 계절이라고 부를 만큼 간첩이 북풍의 소재였다’고 보도했다. 선거를 열흘 앞두고 무장간첩단 사건이 발표된 것은 67년 대통령선거였고, 선거 1주일전 재일동포 간첩단이 검거된 71년 대통령선거 기간엔 5건의 간첩사건이 잇달았었다.
대부분 북풍은 주효했다. 87년 대한항공 공중폭파와 공작원 김현희의 서울압송사건은 보름후 대선에서 민정당 노태우후보를 당선시켰고, 92년 간첩 이선실의 중부지역당 사건은 민자당 김영삼후보 승리에 견인차가 되어주었다.
북풍은 역시 차가워야 제몫을 하는 것인지 햇볕정책아래서 부드러운 훈풍으로 바뀐 북풍은 별 효과를 내지못했다.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라는 메가톤급 뉴스가 총선 사흘전에 발표됐지만 집권여당은 오히려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북핵위기가 고조된 2002년 대선에선 전쟁이냐, 평화냐를 선택하라는 노무현후보의 대북포용정책의 정당성이 설득력을 발휘했다.
금년 선거에도 결국 북풍이 등장했다. 8일 발표된 28일의 남북정상회담이 대선정국에 태풍으로 휘몰아칠지 미풍으로 잦아들지는 아직 가늠하기 힘들다. 정상회담 개최 자체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이미 상당기간 개최설이 떠돌았으니까. 지지부진한 여권을 재정비시킬 마지막 깜짝카드가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미주한인들도 한번쯤 들어본 시나리오다.
정부도 여야정치권도 아직은 대선에 대한 영향력을 굳이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 정부와 범여권은 남북회담의 역사적 의의를 폄하시키지 않기 위해서이겠고 한나라당은 잘 다져온 대선정국에 돌출악재로 작용할까 경계의 분위기가 역력하다. 전문가들도 신중하다. 그동안 핵위기 등 북한변수에 단련되어온 여론이 이제는 웬만한 북풍엔 휘둘리지 않을 만큼 성숙해졌다며 영향력을 평가절하 하면서도 회담성과에 따른 본선에서의 파장엔 여운을 남겨둔다.
북풍의 영향력을 바꾸어 말하면 남북관계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다. 북한문제는 아직도 국내외 한국인 모두의 일상에 스며들어있다. 그것은 전쟁을 겪은 세대의 좌우 이념갈등일 수도 있고 아직 상처가 아물지 못한 이산가족의 한일 수도 있으며 세계화시대의 경제발전에 대한 기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가도, 전문가도, 이산가족도 아닌, 보통사람들에게 있어 ‘북한변수’의 힘은 평화와 연결된다. 한마디로 평화에 대한 기대다.
일단 여론은 정상회담 개최에 대해 높은 지지를 표명했다. 보수언론 조선일보와 갤럽의 공동여론조사에 의하면 75.6%가 개최를 찬성한다. 반대는 20.1%에 그쳤다. 한나라당도 반대의 수위를 조금 낮추었다. 당 차원에선 ‘이벤트성 회담은 안된다’고 못 박았지만 양대 후보들은 회담자체가 아닌 회담내용에 대한 요구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불과 20일 앞두고 발표된 이번 정상회담은 조목조목 트집잡힐 빈틈을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대선을 눈앞에 둔 임기말 대통령의 회담강행에 대한 타이밍의 의혹과 함께 아직 의제도 발표 못한 졸속 합의라는 비판, 개최장소를 다시 평양으로 양보한 ‘저자세’에 대한 지적, 도대체 이번엔 북한에게 어떤 대가를 지불했느냐는 밀실 흥정에 대한 의구심까지…정부의 설득력 있는 답변과 해명이 요구되는 부분이 하나둘이 아니다.
일일이 대답하기에도 궁색한 이 모든 비난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회담의 실질적 성과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로 가는 길 닦기라고 생각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정말 핵을 포기할 의지를 가졌는지 확인하고, 이를 전제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기본틀을 마련할 수 있다면 우선 여론의 지지도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평화선언을 채택할 수도 있고 지난해 부시가 하노이에서 언급했던 종전선언 실현을 위한 남북과 미·중의 4자회담 발판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금년 ‘북풍’의 등급 역시 회담의 결과에 달렸다. 그 성패에 따라 훈풍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반대로‘치졸한 정략’이었다는 질타와 함께 역풍으로 변할 수도 있다.
절대적 파워를 보여줄 수 있는 북풍은 무엇일까. 대선 본선을 며칠 앞둔 12월초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 가능한 일이라고 한 서울 소식통은 말한다.
박 록 / 주 필
rok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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