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숙(어린이 법회고문)
새벽공양 후 반야지혜의 향기 흐르는 불교 2대 정사인 기원정사로 향하였다 다시 인도국경을 넘어 석가족이 모신 진신사리탑 삐푸라하와에서 예불공양을 올리고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로 가는 길은 멀고 안개로 인하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또한 제자 수보리에게 대승경전 금강경을 설하신 이 곳 사위성과 기원정사는 마침내 교화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되었단다. 이른아침 도착한 곳은 오라자드 언덕에서 동산지기가 드린 망고를 먹고 그 씨를 땅에 심어 순식간에 피어 오르게 하고, 부처님의 몸이 천상에 천불로 나투어 기적을 보였다는 큰 동산이 발굴로 파헤쳐진 채 남아있는 천불화현스투파에캽 기원정사와 사위대성의 숲을 멀리 바라보니 하늘은 그지없이 맑고 푸르다. 기원정사에 들어서니 숲에 둘러싸인 넓은 공원이 눈 앞에 펼쳐지고, 높다랗고 기품있는 아난다보리수가 제일 먼저 우리 일행들을 맞이한다. 보리수 아래에 앉아 기도하고 있는 스님과 불자들의 모습이 환희심을 느끼게 한다. 보리수에 합장하고 넓은 기원정사와 수많은 사원 터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는다. 수닷타장자가 부처님께 기증한 정사인데 금강경 설법지로 유명하며, 지금은 폐허가 되어 집터만 남아 있는 유적지이지만 정원은 넓고 아름다웠다.
다음날 우리일행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쿠시나가르 마을로 향했다. 인도는 나라가 워낙 넓다 보니 유적지와 다른 유적지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 더구나 연결하는 도로마저 한정되어 있는데다 도로사정은 더할나위 없이 낙후되어 이동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부처님의 열반장소 쿠시나가르 마을은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구가 작은 시골이었다 했다.
바이샬리에서 마지막 여름안거를 마치신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교화여행을 떠나 쿠시나가르로 가시는 중에 제자 바카리를 교화하시고 대장장이 춘다가 올린 전단나무에서 따온 버섯요리 공양을 드신후 생긴 고통을 표현하지 않고 지친 몸으로 쿠시나가르까지 도착하시어 마을 서쪽에 있는 사라나무 숲으로 자리를 옮기신 후, 사라쌍수 사이에서 열반을 앞두고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은 스스로 자신을 의지하고, 법을 등불로 삼아 밝게 비추며 살아가라” 하신 말씀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부처님 친견후 스님들과 우리 일행은 열반당 안에서 남방스님들의 도움을 밀e아 회주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추어 부처님 전에 예불을 올리고 석가모니불의 정근소리가 법당 내부를 진동하듯 크게 울린 후 한국에서 준비해서 온 황금가사를 입혀드렸다.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부처님은 금빛가사에 감싸여 온화한 미소와 평온한 얼굴에서 청정무구한 불국정토의 상이 겹쳐져 신비로움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마음 내면의 밑바닥에서부터 알 수 없는 기쁨과 눈물이 교차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보살핌이 가득하여 평안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이른아침 13명의 일행실은 대형버스는 여전히 짙은 안개속을 헤매면서 도로를 달린다.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공양은 호텔식으로 먹는둥 마는둥 하고서 몸은 버스에 실었건만 모두들 참선중이다. 얼마 후 수행지로 달리는 차에서 창밖을 보니 여전히 암흑세계에서 저 멀리 먼동이 우리를 반긴다. 곡예하듯 차에 매달리고 차지붕에 물건처럼 포개진채 실려가는 사람들의 표정. 무너진 담장에 걸쳐놓은 현란한 빛깔의 빨래들, 담벼락에 쇠똥을 붙이는 장면이 스치는가 하면 트랙터에 꽃을 장식하고 힘차게 일터로 향하는 풍광도 이채롭다. 아침기온이 쌀쌀하여 두꺼운 옷으로 입고 나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가벼운 옷차림으로 걸어서 제 2결집 장소였다는 꾸마라하 연못을 찾아가자 부러진 흔적을 보여줄 뿐 돌계단은 연못에 잠겨있다. 드넓은 유적지를 거닐며 의미가 부여된 모든 유적들을 한바퀴 돌다보니 감개 무량하다.
바이살리 박물관으로 향해가는 길목에서 따끈한 짜이로 모처럼 여정의 낭만을 느껴본다. 어둡고 눅눅한 나무집에서 아궁이 화덕에 빛바랜 용기로 차를 끓여 따라주는 인도 아낙네의 손길, 말은 통하지 않지만 따스한 인정은 억만겁의 연이다. 원숭이 연못 아쇼카석주, 부처님 사리탑, 파탈리푸트라, 앙라팔리 집터 등을 순례하고 마하트마간디 다리를 건너 파트나로 이동후 호텔에서 휴식을 취했다.
파트나에서 부다가야로 가는 도중 마가다 왕국의 수도였던 라지기르에 있는 밤비리왕이 부처를 위해 만든 불교 최초의 절이라 할 수 있는 죽림정사와 근처에는 수행자들이 도를 닦던 손반다르 동굴, 경전에 나온 칼란다카 연못, 500여명의 스님이 모여 집회를 가졌다는 칠엽굴 등을 둘러보고, 우리일행은 라지기르를 출발하여 나란다에 있는 불교 최초, 최대의 불교대학이었다는 나란다대학 터에 도착하였다. 옛날 현장법사가 이곳에 머물 당시 1만 명의 학승과 1천5백 명의 교수가 있었다니 가히 세계 최대의 대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프랑크씨와 나란다대학 유적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살펴보는 11개의 승원 터와 14개의 사원 터는 대단히 다양한 용도와 독특한 사원 양식으로 눈길을 끌었고, 이른 아침 안개에 휩싸인 나란다 유적은 검붉은 벽돌의 상채기와 폐허의 광경은 감동에 젖게 했다. 장엄한 대학을 보노라니 끝없이 이어지는 적막과 고독함은 옛 수행자 깨달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 불교 문화유산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은 더위를 식혀주는 청량제 역할을 해준다.
부다가야를 향해가는 버스안에서 무사히 성지순례를 회향할 수 있도록 불보살님께서 보살펴주십사 하고 기도와 축원을 하며, 시간을 보낸 우리는 12시 경에 부다가야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식당주방장이 우리 식판 같은 곳에 하얀 쌀밥과 두 개의 화덕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금방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노란 카레와 차파티 두어장을 얹어 가져다 준다. 우리 일행은 차파티를 찢어서 카레를 듬뿍 찍어 맛있게 먹어본다. 하루 온종일 차를 탄 우리일행은 부다가야에 도착했다. 부다가야는 카필라 왕국에서 출가한 태자 싯다르타가 해탈의 길을 얻으려 세_bc坍煇걋 버리고 수많은 스승을 찾아 다니며 혹독한 고행을 하며 가는 곳마다 더 이상 스승이 없음을 깨닫고 홀로 수행하기로 결심한 후 가야에서 약 12㎞ 떨어진 우루벨라라는 마을의 숲을 찾은 곳으로, 근처에는 수자타 마을이 있고 숲과 니란자나강이 흘렀으며 바위로 이루어진 전정각산이 우뚝 솟아있는 평화스러워 보이며 아쇼카왕이 세운 높이 54m의 마하보디 대탑과 실론왕이 세운 대보리사,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자리인 금강보좌와 보리수, 부처님이 머물며 깨달음을 얻기를 청하자 그림자만 놓고 가셨다는 유영굴에서는 고행당시의 뼈만 앙상한 부처님도 뵐 수 있었다.
hyelee2003@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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