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정 칼럼
‘탈레반도 지구촌의 한 형제고 식구다. 봉사단은 순수한 사랑의 마음, 순수한 의료지원을 위해 아프칸에 갔다. 나머지 피랍자를 무사히 보내달라.” 심진표씨 말이다. 7월 30일, 배형규 목사 뒤이어 목숨을 잃은 심성민씨의 아버지다. 원망의 말이 아니다. 증오, 저주의 말도 아니다. 언제나 곁에 있어야 할 이웃의 부탁의 말이고, 비통함을 가슴 깊이 묻어버린 어버이의 말이다.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가 흘린 피만으로도 탈레반 형제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함께 한 다른 21명 형제자매들의 목숨도 지킬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모두가 무사히 돌아오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을 찾은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를 비롯한 23명 선교봉사단은 총 들고 싸우러 간 것이 아니다. 놀러가 눈꼴 사납게 휘젓고 다닌 것도 아니다. 그들을 움직인 마음 자리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잡고 있었겠지만, 아프간 이웃을 당장 개종시키려 간 것도 아닐 것이다.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 버려진 어린이들을 돕고, 보살피러 간 것이 아니던가. 그들은 간호사였고, 미용사였다. 영어통역사, 가정주부였다. 배목사와 함께 며칠만이라도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며, 아프간을 찾은 그들이다. 그들이 죽어야 하고, 납치되어 고통받아야 할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다. 미국의 후원을 받는 아프간 정부와 싸우는 탈레반의 투쟁이라 해도 그렇다.
그렇기에 납치와 살상을 일삼는 탈레반 강경세력을 고발하는 것이다. 아프간 정부가 억류하고 있는 탈레반 수감자들의 석방을 원한다면, 23명의 납치만으로 족할 것이다. 왜 사람을 죽이는가.
탈레반 납치범들은 배형규 목사의 머리, 가슴, 배에 7발의 총을 난사했다. 이유는 목사이고 아팠기 때문이란다. 심정민씨는 머리를 쏘아 사살하고, 마을 도로변에 버렸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이런 짓들이 한 손에 칼을 들고, 다른 손에 코란 들고 믿음을 자랑한다는 무슬림의 참모습인가.
더 이상 희생이 있어서는 안된다. 탈레반이 원하는 ‘수감자 석방의 좌절’이 몰고 올 추가 살상만은 기필코 막아야 한다. 그러나 ‘맞교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이 “테러 세력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아프간 정부도, 한국 정부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제 3의 길을 찾아야 한다. 탈레반 납치 세력과 직접 접촉 통로를 열어야 한다. 미국의 눈을 가리고, 아프간의 뒤로 돌아가는 묘책을 찾아내야 한다. 비록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이 7월 31일, ”또다시 우리 국민의 인명을 해치는 행위가 일어난다면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우리 국민의 희생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군사작전을 각오한 결의가 아니라면”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을 것이다. 사실 한국 정부로서는 선교봉사단 납치와 살상으로 촉발된 무슬림과의 갈등을 무력 충돌로까지 밀어부치기에는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이쯤해서 아프가니스탄 가즈니주 지역 탈레반 최고지도자 겸 사령관 인물라 사비르가 “아프간 정부가 수감중인 동료포로를 석방하거나 한국 정부가 당장 직접 협상에 나서야만 추가 살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한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Joins.com 참조).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서 ‘인질-탈레반 아프간 수감자 맞교환’이 최선의 방책이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요구”임을 분명히 하고 탈레반 납치세력이 이런 상황을 감안, 보다 현실적인 협상카드를 수용하도록 설득, 사태를 풀어가야 할 것이다. 피랍자 가족이 되어 협상자리에 앉는다면 길은 열릴 것이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선교봉사단 배형규 목사, 심성민씨의 피살과 21명 피랍사태는 많은 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 신앙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羊)을 찾아나서는 발길과 아흔아홉 마리 양을 지키는 손길. 땅끝까지 찾아나서는 ‘열심’이 선교와 봉사의 씨앗임을 본다. 또 그 ‘열심’이 돌팔매 당하는 모습도 지울 수 없다. ‘열심’이 뭣인지도 모르는 손들이 던지는….
여기 귀한 목소리가 있다. 삶과 봉사와 선교를 “하나”로 보는 손인웅 목사의 말이다. “현대적 의미의 선교는 곧 ‘디아코니아(diakonia, 그리스어로 봉사를 뜻함)입니다. 일반적인 봉사는 휴머니즘이 근본이지만, 디아코니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반하지요. 그것이 체현돼 몸에 배어 우러나오는 것이 봉사입니다.” 그는 선교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마더 테레사를 꼽는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요. 종교를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아, 저 분이 신앙으로 이같은 일을 했구나’라고 깨닫고 동참하는 것이지요 (donga.com참조). 온 몸으로 실천한 사랑이어라.
스물 한 분 모두 꼭 살아오리라 믿고,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씨를 위하여 촛불을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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