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못한 캘리포니아 부모들에게 가장 고마운 단어 중 하나는 ‘헬시 패밀리즈’이다.
정부가 제공하는 의료보험 메디케이드(캘리포니아에선 메디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빈민층은 아니지만 일반 의료보험에 가입할 형편은 못되는 서민층 자녀를 위한 연방정부의 어린이의료보험프로그램(State Children’s Health Insurance Program)을 캘리포니아에선 ‘건강한 가족, Healthy Families”라고 부른다.
직장보험이 있다해도 본인부담 분이 계속 높아 가는 것이 요즘 추세다. 쥐꼬리만한 봉급에서 해마다 오르는 보험료를 감당하자니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그래서 온가족 플랜을 포기하고 아이들만 헬시 패밀리즈에 의지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이런 서민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요즘 연방의회는 모처럼 ‘우리들의 대변인’이라는 호감까지 들게한다. 더 많은 가족에게 혜택을 주기위해 SCHIP 확대법안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SCHIP는 경제불황과 맞물려 무보험어린이가 급증하자 1997년 클린턴대통령과 공화당주도 의회가 초당적 합의로 마련한 저소득층어린이 의료보험제도다. 수혜기준은 연소득이 연방 빈곤기준의 2배인 4인가족 약 4만달러까지로 현재 6백만명이 혜택을 받고 있다. 연 50억달러의 기금중 70%는 연방정부가, 나머지는 각 주정부가 부담한다.
이 프로그램이 오는 9월30일로 만료된다. 계속되려면 의회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 워낙 인기있고 성공적인 정부프로그램으로 꼽히니 연장될 것은 틀림없다. 여론의 90%가 이 프로그램을 지지한다. 공화당원 대상 조사에서도 지지율이 83%까지 올랐다.
그러나 지금 부시와 의회는 이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또한번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다. 민주당 의회가 이 프로그램의 대폭 확대연장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의회가 이긴다면 연소득 6만달러가 넘는 가정의 자녀들도 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부유층과 빈민층 사이에서 ‘늘 쪼들리며 허리가 휘는’ 중산층 부모들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사안은 좀 복잡하다. 이 프로그램 연장을 위한 안이 3가지나 나와 있다. 간단하게만 살펴보자.
첫째, 상원안이다. 2주전 재정분과위를 17대 4, 압도적으로 통과했다. 공화당의원 10명 중 6명이 민주당에 가세하여 찬성표를 던졌다. 향후 5년간 350억달러를 추가배정하자는 안이다. 통과되면 330만명이 더 혜택을 받게된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80만명이 늘어난다. 재원은 담배세 대폭인상이다.
둘째, 하원안은 이보다 더 확대하여 추가배정이 500억달러에 달해 수혜 어린이가 6백만명이나 더 늘어나게 된다. 하원의 재원마련은 담배세 인상과 함께 노인을 위한 메디케어 예산에서 주로 보험회사로 가는 보조비를 전용하도록 하고있다.
세 번째는 원래대로 하자는 부시의 방침이다. 추가배정을 48억달러만 잡고있다. 이정도 증액으로는 현재 수혜어린이들 커버에도 부족하다고 주지사들은 이미 아우성이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20만명이 오히려 탈락당할 수 있다.
상원과 하원은 각각의 안을 금주내에 처리하겠다고 벼른다. 부시는 상원안과 하원안 모두 반대한다. 어떤 쪽이 의회를 통과하든 거부권를 행사하겠다고 위협한다. 그러나 이번엔 민주당의 입지가 조금 더 강해 보인다. 설사 거부권을 행사 하더라도 번복될 확률이 다른 때보다 높다. 공화당의원들의 무더기 이탈이 예상되어서다. 어린이건강대책에 반대한다는 것은 재선을 앞둔 의원들에겐 정치적 자살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부시가 어린이보험의 확대를 반대하는 것은 프로그램 자체보다는 그 여파일 것이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철학적’ 근거에 의한 반대다. 그는 SCHIP가 의회안대로 바뀌면 저소득층을 넘어 중산층까지 확대되어 ‘정부가 운영하는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로 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민간기업의 자유경쟁을 죽이는 ‘의료제도의 사회주의화’라고 경고한다. 작은 정부를 표방하는 공화당이 정부주도의 헬스케어 확대를 허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념 때문이다.
서민들에게 당장 시급한 것은 이념보다 자녀의 건강이다. 20년전 수입의 7%를 차지했던 의료관련비가 요즘은 20%로 늘어났다. 그대로 방치하면 현재 9백만명에 이르는 무보험 어린이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념논쟁은 이런 문제를 해결한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못해 의료보험 갖기가 숨찬 ‘우리’는 진보나 보수, 이념과 상관없이 이번 대결에서만은 의회가 백악관을 누르고 이기기를 응원하고 있다.
박 록 /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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