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비자 면제 프로그램(VWP)을 확대하는 새 법안이 미 의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이르면 내년 7월부터 미국 방문비자 없이 한국여권만 지참하여도 3개월간 미국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
세계 12위 경제대국인 한국이 무비자국에 포함되면 국가적 자긍심은 더욱 고양될 것이다. 이제는 새벽부터 미 대사관 앞 줄서기와 같은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일은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국민 정서적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은 반드시 미 비자 면제국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 지금이 과연 무비자국 가입을 위한 가장 적기인지, 또한 무엇 때문에 무비자가 필요하며 우리 국가 이익과 사회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동할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냉철한 검토가 필요하다. 동반자적 평등 관계 실현이라는 실익 없는 명분에 집착하여 무리하게 무비자를 추진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무비자에 대한 충분한 법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더욱이 한국의 국익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최적의 무비자 시점을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무비자 국가 지정은 기회가 아니라 오히려 예상치 못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사실인즉, 대부분의 한국 국민은 미국 방문 비자 취득에 전혀 문제가 없다. 과거의 까다로운 비자 발급 조건에 다소 미달되던 사람들도 정식비자를 받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비자발급 조건이 미달되는 극소수 사람들을 구제하고 대사관 앞 줄서기란 국민정서상의 반감을 해소하기 위한 무비자 추진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곰곰이 따져 보아야 한다.
먼저 한국이 무비자국이 되면, 90일까지 미국 체류가 가능하다. 그러나 90일 내로 반드시 미국을 떠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법 체류가 된다. 현재 미국 내 한국인의 불법 체류는 21만 명 정도로 6위 수준이다. 캐나다나 멕시코 국경을 넘어온 숫자까지 포함한다면 한국인의 불법체류자는 2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비자 추진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불법체류율을 낮추기 위함도 그 하나이다. 그러나 방문비자 소유자도 불법체류를 하는데, 무비자가 되면 불법체류가 없어질 것이라는 논리는 그 근거가 미약하다. 미 의회의 불법체류자 구제 법안은 과거에 비해 보다 더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한국은 교육대란과 조기퇴직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만일 무비자가 한국탈출의 방편으로 유행병처럼 번진다면 이는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국가의 손실이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 무비자로 입국하면, 미국 내에서 체류 연장이나 비자 변경이 금지된다. 즉, 90일 안에 반드시 미국을 떠나야 하는데 이것이 한국이 원하는 무비자의 구체적 이익이 될 수 있을 것인가는 의문이다. 방문 비자로 입국하면 학생비자나 취업비자 등으로 변경할 수 있고 영주권 신청도 가능할 수 있는데 이 가능성이 모두 차단된다. 무비자로 잦은 방문을 시도하면 의심받고 추방당할 우려도 있다.
무비자 법안 통과 소식이 전해지자 예전에 불법체류 기록이 있는 사람들의 미국 재입국에 관한 문의가 쇄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6개월 이상 1년 미만 불법체류 할 경우 3년간, 1년 이상 불법체류를 하면 10년간 입국 금지가 된다. 불법체류로 인한 추방 재판이 늘어나면 신종 이민업무의 폭주도 예상된다.
따라서 방문 목적 위반이나 불법 체류 사실이 드러나면 미국 재입국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무비자는 어떻게 보면 이민법상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수 있고, 한국인의 미국정착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셋째 비자 면제국은 취소될 수 있다. 아르헨티나도 한때는 비자 면제국이었으나 IMF로 인해 비자 면제국에서 취소되었다. 따라서 한국경제의 악화나 무비자의 오용과 남용에 기인한 미국 내 불법체류 및 각종 범법행위의 급증은 무비자국 취소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는 국가 위신의 추락이며 한국인 전체를 색안경을 끼고 매도할 수도 있다. 따라서 무비자국이 되는 것 보다 무비자국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미국비자 면제 프로그램 해당국은 27개국이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미국 방문 시 이민 의도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비자국이 되기 전에 무비자에 대한 대국민 홍보와 사회문화적 환경 조성이 절실하다. 잘못된 정보나 법의 무지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올바른 계몽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울러 이민 의도가 스스로 없어지도록 열린 이민정책도 함께 병행하여야 한다.
무비자 법안은 통과 됐지만, 한국정부는 전자 여권 도입 등 신규 가입국 조건을 충족하는 시기를 조정, 적절한 시기에 무비자국이 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무비자는 국익보다는 단지 FTA 협상 보너스나 대통령 선거용이란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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