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 시험이 끝난 날이다. 강한 햇살만큼 눈부신 금요일 오후였다. 오늘은 피터 이 교수님 댁에서 저녁 초대를 받았다. 그 분은 가끔씩 몇 되지 않는 한국유학생들을 불러서 한국음식을 먹게 해 주셨다. 사모님은 성격이 소탈하고 학생들에게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사모님의 정성어린 손끝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낯선 이국땅에서 느끼는 긴장감을 풀어주는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이었다.
나는 교내 카페테리아를 지나서 교정을 가로 질러 주차장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양 옆으로 나란히 줄을 서서 키 재기를 하듯 늘씬하게 쭉 뻗은 야자수 나무들. 그 위로 강렬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출렁거리며 걸터앉아 있었다. 주차장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도 어느새 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혔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어 에어컨 버튼을 최고조로 높였다. 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은 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반가웠고 갈증을 해소하는 것만큼 온 몸이 시원했다. 나는 차를 후진시켰다. 후진하는 순간 둔탁하게 부딪치는 무게감을 느꼈다. 동시에 두 대가 빠져 나오려다가 낸 접촉 사고였다. 그때 난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은 지 얼마 안 된 초보운전자였다. 당황한 나는 놀라서 핸들만 붙잡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상대방 차 주인이 걸어왔다. 그는 짧은 스포츠머리 때문에 순간 남자로 착각을 할 뻔했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갸름한 얼굴이 전체적인 이목구비가 서구적인 마스크에 동양적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 형이었다. 나는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서 말했다.
“미안합니다. 차를 못 봤어요.”
“저도 못 봤어요. 괜찮아요?”
허리를 구부린 상태에서 운전석을 향해 날 염려해서 물어왔다.
“예. 괜찮은가 봐요.”
나는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다친 데는 없었다.
그녀에게서 폴로 향수 냄새가 풍겼다. 여자가 웬 폴로향수인가.
“다행이네요. 경미한 부딪힘이라 그냥 가도 될 것 같은데요?”
그녀는 나를 향해 윙크를 했다. 말하는 언행이나 행동이 시원시원한 것 같아서 마음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제서 나는 차에서 내려 뒤로 갔다. 범퍼는 아무 흠집 없이 깨끗했다. 그때 케빈이 나에게로 달려왔다.
“음미…. 너를 한참 찾았잖아.”
그는 숨을 몰아쉬며 날 봤다. 케빈은 나의 이름을 부를 때 은미를 음미가 되는 발음으로 부른다.
“…….”
나는 그를 무시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좋아요.”
“은미씨. 난 엔젤라예요.”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서로 악수를 하며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엔 힘이 들어 있었다. 서로 잘 가라는 인사를 하며 우린 곧 헤어졌다.
그녀는 회색 볼보차로 곧장 걸어가 운전석 문을 열면서 나와 케빈을 바라보며 곧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났다.
“저 여자 누구냐?”
“케빈, 우리 월요일 날 보자. 좋은 주말 보내. 안녕.”
나는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맥 미러 속에는 케빈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인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온 금발머리의 남자였다. 싫다고 면박을 줘도 노여워하지 않고 늘 내 주변에서 맴돌았다.
이 교수님댁에는 수지와 케빈이 와 있었다. 수지는 한국 유학생들 중 나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다. 케빈은 넉살이 좋아서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 다녔다. 사모님과도 구면이었고 살갑게 구는 그를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거실 한쪽에는 디귿 형태로 소파가 놓여 있고, 벽 곳곳에는 다양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 중 피아노 위에 걸어 놓은 그림의 소재가 참으로 독특하게 보였다. 세 꼬마소년들이 연주하는 모습이 귀엽고 앙증스런 그림이었다. 나는 그림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결국은 사모님에게 물어 봤었다. 사모님이 손수 지점토로 만드신 작품이라고 했다. 그 솜씨가 놀라웠다. 나와 수지는 사모님이 부엌에서 음식 준비를 하는 것을 도왔다. 수지는 싱크대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에서 상추를 씻으며 환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는 듯 했다.
“너희들이 있으니 조용하던 집안이 사람 사는 것 같아서 좋구나.”
사모님은 불고기를 볶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난 그 옆에서 접시를 들고 서 있는 나에게 고기 한 점을 내 입으로 먹여 주시며 간이 잘 배었는지 대답을 기다리며 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모님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케빈은 여지저기 기웃거려도 같이 놀아주는 상대가 없으니까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는 악보도 없는 상태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멘델스존의 ‘무언가’ 중 ‘베니스의 곤돌라 ‘30의 6번’ 곡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가 끝나자 우린 주방에서 박수를 쳐 주었다. 그날 교수님댁에서 같이 한 식사는 예기치 못한 그의 연주를 들으며 분위기 있는 저녁식사 시간을 보냈다.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과일과 커피를 마시며 케빈의 피아노 연주는 계속 이어졌다.
피아노소리를 듣고 있으니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사춘기 여고생 때였다. 어느 날 새로 오신 풋내기 교생선생님 한 분이 오셨다. 선생님의 이름은 이종원이라고 칠판에 쓰고 나서는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선생님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이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낭만과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지적인 향기를 풍겼다.
나의 짝사랑은 그렇게 순간적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선생님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는데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선생님의 수업이 있는 날은 노래와 춤을 가르쳐 달라고 우리들은 떼를 썼다. 결국은 우리의 억지를 물리치지 못하고 그 아우성에 선생님은 함락을 당하곤 했다. 우린 책상을 뒤로 옮겨놓고 나면 넓은 스테이지가 즉석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선생님이 가르치는 포크댄스 스텝에 따라 즐겁게 따라했던 그 시간들…
얼마의 시간이 흘려서 선생님이 떠난다고 했을 때 밤새 울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 후로 선생님과 두어 번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네가 대학 입학하고 나서 찾아오면 그때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선생님은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피아노를 멋지게 치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의 연주에 빠져 들었다.
오래 간만에 한국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다. 불고기와 김치찌개로 허기진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채울 수 있어 행복한 하루였다.
며칠 후 친구들과 볼링장엘 갔다. 두 편으로 나누어서 시합을 했었다. 난 첫 스타트에서 스트라이크였다. 이어서 세 번이나 스페어 처리를 하면서 나는 흥분하며 좋아했다. 다들 손뼉을 쳐 주며 좋아했다. 그때 누가 뒤에서 말을 걸어오는 여자가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 전 학교 주차장에서 차 접촉사고 났던 그녀였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엔젤라, 친구들과 같이 볼링 치러 왔나보죠.”
“혼자 왔어요.”
“볼링장엘 혼자 와요?”
나는 의아해 하며 말했다. 청바지에 파란색 셔츠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구경만 하려고 가끔 와요.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게임이 끝난 뒤 같이 커피한잔 할래요?”
“글쎄요.”
“내가 아는 곳이 있는데 그 곳으로 가요”
“그럼 이따가 게임 끝나고 봐요.”
그녀는 우리 일행이 있는데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게임을 하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내가 링 위에서 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무심코 쳐다봤을 때 그녀의 눈빛이 나와 마주치면 윙크를 하면서 엄지손을 치켜세우며 축하해 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엄지와 검지 손으로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고맙다는 답례의 사인을 보내 주었다. 마치 오래 전 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그녀와 무척이나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게임이 끝나고 친구들과 헤어졌다. 케빈은 친구들과 같이 떠나면서 나와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몹시 아쉬워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녀와 나란히 걸어서 볼링장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녀가 가는 데로 따라 갔다.
우리가 간 곳은 유명한 ‘스완 레스토랑’이었다. 발레파킹을 하는 차들은 대부분 고급스런 차들이었다. ‘스완 레스토랑’ 이라는 LCD 사인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현대적 감각을 살린 아치형의 다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아래엔 분수대 물이 흐르고 있었다. 키 작은 가로등들은 달빛에 젖은 나무 사이로 별이 쏟아질 듯 빛이 나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은 로맨틱한 클래식 선율로 밤하늘에 흘려 내리고 있다. 홀 안으로 들어서니 웨이터가 우리를 맞이하며 테이블로 안내했다. 약간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웨이터는 흔히 내가 다니는 식당에서 보아 오던 웨이터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나는 처음 와보는 분위기에 조금은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 아늑한 실내 인테리어는 젊은 여인들의 사랑을 속삭이기는 딱 좋은 분위기였다. 잔잔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내가 한때 좋아했던 곡이라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와 결혼 후에 작곡한 곡으로 슬픔, 광기, 갈등, 긴장, 환희, 절망, 고통, 사랑이 어울려진 젊은 여인들의 음악이다. 이런 곳에서 음악을 감상하다 보면 사랑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안내한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저녁전이라 갑자기 시장기를 느꼈다. 그녀는 메뉴를 나에게 건네며 원하는 것을 시키라고 했다. 그 사이 그녀는 웨이터와 대화가 오고 갔다. 나는 랍스터를 선택했다.
잠시 후 레드와인을 가져왔다. 와인 잔에 절반 정도만 채워주고 즐거운 식사를 하라며 웨이터는 가버렸다. 엔젤라는 나에게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축배를 들자고 했다. 와인의 검붉은 색이 강렬하게 잔 안에서 출렁거리며 크리스탈의 잔끼리 부딪치는 특유의 경쾌한 울림이 긴 여운으로 메아리친다. 나는 그녀가 하는 대로 따라만 했다.
“은미는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대한민국 남쪽에서 왔어요.”
“맙소사! 저도 장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죠. 아버지가 한국사람, 엄만 영국. 그 사이에 태어난 나는 혼혈이죠. 하지만 한국에 대해선 잘 몰라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빠가 한국인이라고 하니 놀랍고 반가웠다.
“아! 그랬군요.”
그때서야 서구적 이목구비였지만 동양적 이미지를 느끼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이렇게 만났으니 좋은 친구해요. 난 치과의사예요. 나이는 30살.”
치과의사? 의외였다. 의사라는 직업이 그녀하고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사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그 후로 우리는 자주 만났었고, 그녀는 나를 동생 이상으로 잘 해줬다. 어설픈 미국생활의 문화와 환경에 나는 늘 긴장하며 심한 외로움을 앓고 있을 때였다. 낮선 외국에서 겉돌던 나는 그녀로 인하여 활기찬 나날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서로의 마음이 움직여서 우린 하늘로 바다로 날아다니며 알록달록한 추억의 인연을 만들어 나갔다. 난 그녀를 언니처럼 따랐다. 때로는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를 그녀가 옆에서 도와주기도 하고 가끔씩 그녀는 나에게 꽃을 사주기도 했다. 꽃 선물을 받기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핑크 튤립과 빨간 장미꽃을 받았다.
주말에는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영화의 제목은 ‘더 데이 애프터 투머로우(The Day After Tomorrow)’ 나와 그녀는 팝콘과 콜라를 마셔가며 영화 관람도 했다. 영화의 내용은 기상학자인 잭 홀 박사가 남극에서 빙하 탐사를 하던 중 지구에 기상변화가 일어날 것을 감지하고 얼마 후 국제회의에서 지구 온난화에 관한 재앙을 암시하는 내용을 주제로 한 영화였다.
그녀는 병원에서 퇴근을 하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달려와서 날 데리고 나갔다. 집 근처의 ‘사계절’이란 카페테리아로 우리는 들어갔다.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여자가 주문을 받으러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엔젤라는 우선 생맥주부터 시켰다. 플로리다 열대기후의 작렬한 무더위로 인해 우리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500cc 짜리 잔에 가득 채워져 있던 생맥주를 비웠다. 그녀는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입가에 묻어난 맥주의 잔거품을 혀로 이무기가 똬리를 틀면서 돌돌 말아 돌리듯 혀를 핥고 있었다. 난 몇 모금의 생맥주을 마셨을 뿐인데 벌써 취기가 오른 사람처럼 눈두덩 주위가 빨갛게 물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가족과 떨어진 외롭고 시린 내 가슴을 데워 주는 엄마였다. 그녀가 나를 집에 데려다 줄 때는 꼭 볼에다 키스를 해 주었다. 어쩌다 서로 바빠서 며칠씩 만나지 못하면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난 그녀가 내 옆에 있으면 왠지 듬직하고 마음이 편했다. 그녀와 난 친자매 이상으로 가까워졌다.
“넌 남자친구 있니.”
느닷없이 엔젤라가 나에게 물어왔다.
“남자친구! 아직 없어.”
“저번에 볼링장에서 보니까 괴짜 같은 녀석이 네 옆에 있던데.”
그녀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했다.
“케빈이라는 친군데 날 좋아한대. 하지만 나보다 어려서 관심 없어.”
“너도 그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글쎄 아직은 그런 생각을 안 해 봤어.”
“그래에……”
따뜻한 눈빛 하나, 사려 깊은 말 한마디 하나에도 나는 늘 그녀에게 고마워했었다. 어쩌다 한동안 만나지 못하면 전에는 없던 질문들이 많아졌다.
“너 그 남자와 만났니. 뭐했어. 너에게 잘해주지!”
“그 녀석이야 항상 변함없어.”
“그러지 말고 정식으로 한번 사귀어 보지 그래!”
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홀짝거리며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애들인데 뭐. 그냥 동생 같은 친구야.”
“너한테 난 어떤 존재야!”
“날 사랑해 주는 좋은 언니.”
나는 그 말을 해 놓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은미야…….”
그녀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 두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아무런 표정도 나타내지 않은 채 한쪽 카페의 벽면을 바라보았다.
그 날 이후 웬일인지 그녀에게 전화가 없었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세미나가 있으면 며칠씩 만나지 못했던 적은 있었다. 그때는 이미 그녀의 부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궁금하다거나 걱정을 하며 불안해하지는 않았었다. 말없이 연락이 두절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그녀의 연락이 없자 나는 안절부절 했다. 혹시 내가 뭔가 실수를 한 것은 없는지… 별의 별 생각을 해 봤지만 또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플로리다의 날씨는 변덕스럽다. 환하던 대낮이 갑자기 먹구름이 덮치더니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난 지독한 고독을 느끼며 침대에 쓰러졌다. 난 그녀의 연락처를 모른다. 왜 지금까지 엔젤라의 전화번호 하나쯤은 내 기억에 입력을 해두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다. 마음이 답답했다. 기분이 이렇게 우울할 때 교수님댁에서 저녁초대를 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렸을까. 비명처럼 날카롭게 울어대는 전화벨 소리에 스프링 반동에 튕겨 나가듯이 나도 모르게 뛰어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였다. 반가움과 화가 동시에 났었다. 왜 그랬는지, 내가 따지듯 물었다.
“몸이 안 좋아서 너한테 연락 하지 못 해서 미안해. 몸살이었는데 이제는 괜찮아. 그래서 사과하는 뜻으로 널 우리 집으로 초대를 하고 싶은데”
엔젤라가 말했다. 며칠 동안의 외로움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듯 나는 어린아이처럼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녀의 집으로 초대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충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하고 집에서 나왔다. 한국에서는 남의 집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는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마켓에 들러 무엇을 살까? 고민하다 그녀가 좋아하는 버드와이즈 맥주를 한 박스 샀다. 오늘은 그녀의 연락처를 꼭 받아 두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그녀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의 집은 침실과 서재로 나누어 있었다. 서재에는 많은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쪽의 벽면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대학 때까지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에는 그녀의 지금 모습과 너무나 상반된 아리따운 아가씨가 활짝 웃고 있었다.
“옛날 사진을 보니 너 대단한 미인이다! 이제라도 머리도 기르고 여성스럽게 예쁜 옷을 입어 보지 그러니.”
나는 사진들을 들려다 보며 주방에서 접시에 야채를 담고 있는 엔젤라를 쳐다보았다. 그때 엔젤라는 오이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하며 기분이 좋은지 대답 대신에 활짝 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바쁘게 식탁에서 주방으로 분주하게 왔다 갔다 했다.
테이블 세팅이 끝난 그녀는 날 식탁 앞으로 데리고 가 의자에 앉도록 했다. 그녀가 준비한 식탁에는 야채샐러드가 은쟁반에 담겨져 있는 것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기 좋았다. 중앙에는 화려한 천사의 조각상으로 된 촛대가 두개 놓여 있었다. 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윙크를 했다. 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어 윙크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 윙크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관심을 표현하고자 할 때 하는 행동이라 여겼는데 그 금기를 깬 것이 바로 엔젤라였다.
“간만에 귀한 손님이 왔으니 우리 음악 들으면서 분위기 좀 잡자. 어때. 너도 좋지.”
엔젤라는 오디오 세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플레이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테이블 한쪽에는 레드와인이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으며 와인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
시라와 그레나슈로 만든 특별한 쿠베 루즈(Cuvee Rouge)라는 스파클링 와인이라고 했다. 우리가 스완에서 처음 마신것이라고 했다.
“엔젤라. 너무 근사하다. 먹기 아까워.”
나는 화려한 식탁을 보고 좋아했다.
“다행이다. 은미가 이렇게 좋아하니 나도 기분이 좋다.”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진한 적포도주 품종이라 색깔도 붉은 빛을 띠었고 다른 맛이 느껴졌다. 진하고 묵직하면서 동시에 경쾌한 기포가 입안 가득히 퍼져 매혹적이었다. 우리는 식사보다는 와인을 마셨다. 서로 잔을 부딪치며 쿠베 루즈 향에 빠져서 주고받았다. 나는 잠시 엔젤라가 있는 자리에 ‘케빈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그의 감미로운 연주를 들었으면’ 라는 생각을 하며 혼자서 배시시 웃었다.
그녀가 틀어놓은 음반은 얼마 전에 꽃 선물을 받고서 보답으로 내가 사준 것이었다. 성악곡을 전문으로 연주하는 ‘어너니머스(Anonymous 4)’ 라는 여성중창단이 내놓은 ‘사랑의 환상’이라는 음반에 실린 13세기 사랑의 노래들이었다. 내가 운전하면서 자주 듣는 음악이기도 했다. 이 음반에는 중세의 그림 속에 들어 있는 표정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인에 대한 진실한 고뇌, 풍자와 유머가 넘치는 사랑을 고백한 멜로디다. 내가 엔젤라 에게 ‘사랑의 환상(Love’s Illusion)’ CD를 선물한 이유는 이런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진심으로 바래서였다.
“너 정도면 많은 남자가 프러포즈를 했을 것 같은데, 왜 지금까지 결혼 안했어.”
“그러게 나도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네.”
그녀는 건성으로 대답을 하며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나이도 30살이면 벌써 아이도 있어야 하는 나이잖아.”
“사실은 육년 동안 동거하던 애인이 얼마 전에 날 버리고 결혼을 했어.”
그녀는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에게서 순간이기는 했지만 진한 외로움과 내면의 아픔이 느껴졌다. 난 진심으로 그녀를 위로를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나는 단숨에 와인을 마셔버렸다.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재스민 향기가 바람을 타고 집안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어떤 남자였는데, 어떻게 육년이나 살다가 다른 여자에게 장가를 갈수가 있었을까? 그래서 넌 말없이 보내 주었단 말이야!”
나는 속이 상해서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되어 목소리를 높였다.
“………….”
그녀는 대답 대신에 스테이크 한 점을 입으로 가져갔다.
“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이제는 많이 좋아졌어.”
“엔젤라. 이 음악처럼 널 아끼며 사랑해 주는 남자를 다시 만날 거야.”
우리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두런두런 속삭이며 마셨다.
난 그녀가 따라 주면 촌스럽게 와인을 단숨에 쭉 들어 마셨다. 그녀는 건배를 권했다. 나는 그녀가 계속 따라주는 대로 잘도 마셨다. 대화를 나누면서 마셔서 그런지 술에 취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몇 잔을 더 마셨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었다. 내 몸에 와인의 알코올 성분이 가득한 열기를 식히려고 화장실엘 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나는 세상이 빙글 빙글 돌아가는 것처럼 갑자기 어지러웠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너무 가벼워서 몸뚱이가 중심을 잃어버린 듯이 흐느적거렸다. 결국 무게의 중심을 잃고 주저앉아 버렸다. 난생처음 와인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몸속에서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던 모양이다.
“은미. 내가 도와줄까?”
그녀는 언제 들어왔는지 휘청거리는 나를 부축하며 도와 주려했다. 홀짝홀짝 마신 술이 어느 한 순간부터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했다. 결국 난 그날 집으로 가지 못했다. 세수를 하고 나오니 어지러움과 몽롱한 정신이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테이블에 앉아서 다시 잔을 부딪치며 마시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모든 만물이 잠든 이 시간. 나의 말초신경은 최대한 느슨하게 풀어져 나른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어미다운 포근함으로 나를 감싸 부축을 해서 자기 침실로 데리고 가서 눕혔다. 그녀가 나가고 난 뒤 침대에서 누웠다. 그때 두 여인이 나체로 나란히 자는 모습이 내 시선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졸음이 쏟아져 난 곧 잠이 들었다.
잠결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눈을 떴다. 새벽의 어둠이 그녀의 자는 얼굴 위로 연하게 번진 그림자는 본래의 모습과 다르게 늘어져 자고 있었다. 언제 벗었는지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벗겨져 있었다. 평생 옷을 벗고 자보기는 처음이다. 그녀도 맨몸으로 내 옆에서 나를 껴안고 있었다. 나는 옷을 벗은 기억이 없었다. 편안하게 자라고 그녀가 벗겼나 보다 생각했었다.
오랜 간만에 어린 시절 맡아 본 그 냄새는 엄마의 냄새였다. 엄마 품에 안겨서 자는 것 같이 포근했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엄마의 손으로 나의 배를 쓰다듬어 주면 편안하게 잠들었던 기억이 났다. 때로는 무서운 꿈을 꾸다 깨어나서 큰 방으로 달려가 엄마 품에 안겨 꼭 끌어안고 엄마 젖을 만지면서 잤던 기억도 났다. 피가 돌고 피부와의 접촉에서 오는 따뜻함을 느끼며 다시 잠이 들었던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잠결에 온 몸을 덮는 이상한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떤 손길에 의해서… 잠에 취한 망각에도 재빠른 속도로 온 몸의 세포들을 잠 깨우고 있었다. 마법에 끌리듯 원초적 본능이 내 몸에 잠자고 있던 모든 세포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강렬한 자극과 짜릿한 황홀감. 내 몸을 애무하는 가쁜 숨소리에 나도 모르게 신비스런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려 한다.
꿈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곧 꿈이 아님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촉촉한 입술이 나의 유두를 빨고 있었다. 부드러운 비단 물결의 파도가 내 작은 몸속을 살랑대며 실핏줄 터지듯 하얗게 부서져 가고 있었다. 비늘처럼 일어서는 생소하고 달콤한 바람이 끌고 가는 손길에 따라서 출렁거릴 때마다 내 정신이 혼미하여 기절할 것만 같았다. 바람결에 흐느적거리는 내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이제는 더 이상 자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떴다. 그녀는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어봐.”
나의 귀 볼에 대고 속삭였다.
“너를 사랑한다. 삼 개월 동안 이런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학교에서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난 너를 사랑했어. 이 날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모를 거야. 너를 사랑해. 날 믿어. 두려워하지 마. 곧 기분이 좋아질 거야.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 그래 그렇게 사랑해.”
그는 어린애를 타이듯이 말했다. 그녀는 손은 여전히 내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귀가 간지러웠고 온 몸이 간질거려 나도 모르게 몸을 뒤틀었다. 그녀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황홀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느끼는 첫 경험이었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노래에 춤을 추며 깊은 마법의 성으로 빠져들었다. 온 우주만물이 그녀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득함으로 채워졌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이다. 이제는 영영 돌아 올수 없을 것 같은 진한 쾌감을 나는 느꼈다.
그 와중에도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지금 그녀를 뿌리치지 않으면 평생 그녀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엄마의 슬픔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망각한 이성을 찾게 해주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쳤다.
“엔젤라, 그만! 그만하라고.”
나는 그녀를 밀어내고 벌떡 일어나 응접실로 나왔다. 어느새 어둠이 거치고 아침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아직도 내 몸에 남은 그녀의 손길이 머문 곳에는 진한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녀에게로 달려가 좀 전의 달콤함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혼란스러웠다. 잠들기 전에 보았던 그림이 생각났다. 구스타브 쿠르베의 ‘잠’이란 상류층 여성들의 동성애를 그린 그림이었다. 왜 그녀의 방에 그 그림이 걸려 있었는지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낸 것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렸을까? 그녀는 어느새 옷을 입고 나왔다. 타월을 가져와 내 어깨를 덮어주었다. 알 수 없는 액체가 내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흘려 내렸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큰 머그잔에 커피를 따른다.
“커피 좀 마셔 봐. 기분이 좀 좋아질 거야.”
“우리 더 이상 만나지 말자. 친구처럼, 언니처럼 때로는 엄마같이 좋아했어. 하지만, 지금은 혼란스럽고 알 수 없는 슬픔뿐이야. 이제 나는 그만 가봐야겠어.”
나는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가 옷을 입고 나왔다.
“가지마. 할 말이 있어…”
난 말없이 소파에 다시 앉았다. 창밖을 통해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바라보면서 빨리 저 햇살이 비취는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을 외면했다. 내가 알던 세상에서 분리된 느낌이었다. 소파에 기대어 천청을 바라보며 그녀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삼 개월 동안 너를 만나면서 난 항상 긴장했어.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한 여자에게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 네가 멀리 도망칠까봐 널 만날 때마다 긴장했었어. 전 애인도 여자였어. 육년 동안 동고동락을 했던 금발의 여자 친구가 내 곁을 떠났어도 널 만난 후로는 더 이상 힘겨워하지는 않았어. 너에게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몹시 두려웠어. 네가 케빈 애기를 할 땐 속으로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를 거야. 그 녀석에게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초초감과 불안함. 아무것도 모르는 널 어떻게 해야 할지 참으로 많은 갈등 속에서 어제 너를 집으로 초대하게 된 거야. 솔직하게 고백하려고… 하지만, 기회가 없었어. 술에 취해 자는 널 보면서 미리 말하지 못한 것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게.”
“.........”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나니까 마음이 후련하다. 은미 내 곁을 떠나지 마. 부탁이야. 기다릴게…. 만약… 만약에…네가 내 곁을 떠난다면 다시 힘든 고통의 시간들이....... 이별이란 끔직한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야. 널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날 살포시 안아주었다. 난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안으며 나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난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 고인 물기를 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몹시 미워했던 마음이 봄눈 놓듯이 사그라졌다. 그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조용히 그녀의 집에서 나왔다. 집에 와서도 온통 그녀의 생각으로 가득했었다. 엔젤라와의 시간들을 되감아 보았다. 그녀와 처음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빛바랜 영상처럼 지나갔다. 왜? 그녀가 나에게 그토록 잘해 주었는지. 안개 같던 그녀의 정체가 결국은 이것이었구나!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문점이 많았었다. 나에게 무슨 꽃을 좋아하냐고 무심하게 지나가는 말로 물어 왔을 때, 나는 백합과 튤립, 안개꽃을 좋아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런 말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핑크색 튤립과 빨갛게 활짝 핀 장미와 안개꽃을 예쁘게 포장하여 선물을 해주었다. 그땐 난 그저 좋아만 했었다. 그녀의 숨겨진 의도를 전혀 알아채지 못 했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도 모르게 조금씩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길들어지고 있었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어느덧 그녀와 헤어진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그 사이 엔젤라에게 몇 번 연락이 왔지만 난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녀를 전처럼 자유로운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내면적으로 그녀가 몹시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슬픔 감정이 내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현실을 망각하고 무의식의 세계에서 헤매는 나를 발견했다. 그녀에게 달려가고픈 충동이 나를 허무하고 허전하고 허망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내 옆에 없고 혼자 있다는 것이 참으로 낯설게 다가왔다. 나의 끝없는 갈등이 이어졌다. 이 교수님의 초청에도 흥미가 없었다. 모든 것이 캄캄한 절벽이었다. 의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들이 나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데 많은 아픔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사랑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내속에 내재된 두려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스스로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것들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자란 나는 성에 대한 억압의 편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내가 그녀를 원하면서도 이토록 갈등하며 괴로워하는 것은 그 벽을 깨뜨릴 용기가 나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현실과 무관하게 그녀를 그리워하는 이율배반적인 자신이 싫었다. 학교공부도 그녀로 인해 집중이 되지 않았다. 교수가 하는 강의 내용도 내 귀에는 더 이상 들리지도 않았다. 수업을 포기하고 파킹 장으로 달려갔다. 편견을 깨뜨리기로 두려움에서 해방되기로 했다.
하늘엔 구스타브의 그림이 푸르스름한 구름과 빛이 반사되어 몽환적인 분위기로 퍼진다. 잠들어 있는 두 여인에게서 번지는 신비로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애매모호한 윤곽선처럼 불투명한 시간들. 천상의 비밀을 알아버린 나의 그리움. 가슴에 짓눌렀던 어떤 무게로 부터 자유를 느끼는 것 같았다. 난 지금 그녀에게 달려가 말할 것이다. 나도 널 사랑한다고, 영혼과 영혼이 육체와 육체가 하나가 되어서 엄숙한 사랑의 언약식을 갖고 싶었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내가 이런 행동을 옮길 수 있는 용기에 너무 기뻤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때였다. 백미러를 통해서 다른 차 두 대가 서로 충돌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두 대의 차에서 남자와 여자가 각자의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은 악수를 하고 있었다. ‘어, 수지잖아.’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남자도 낮이 익은 얼굴이었다. 순간 내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 엔젤라. 믿을 수가 없었다. <끝>
입상 소감 <강송화>
즐겁게 시작한 글쓰기
자신감 상실한 채 몸살
오랜 시간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항상 나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 9월부터 마음에 담아 두었던 글쓰기 공부를 실행하게 되었다. 소설쓰기 공부의 즐거움은 잠깐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무디어 버린 나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며 자신감을 상실한 채 몸살을 앓았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이 큰 인내와 시간, 노력 없이는 안 된다는 것도 곧 알게 되었다. 소설. 아직도 소설을 잘 모르겠다. 여러 가지로 부족함으로 가득하다. 생각한 만큼 작품이 나와 주지 않아 낙심하고 있을 때의 낭보다. 가뭄에 메말라 있던 가슴에 한줄기 단비이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빛이고 자신감이다.
수고해 주신 한국일보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다시 소설 쓰기에 전념하라는 채찍으로 알겠다. 컴퓨터에 컴맹인 저를 가르치면서 구박하던 남편과 한국에 계신 친정어머님, 그 외의 문학회멤버들. 소설 쓰기의 이론공부를 지도해 주신 선생님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심사평
응모작 60여편 수준도 전반적 향상
무분별한 영문표기 눈에 거슬려
올해 단편소설 부문에서는 60여편이 응모되었다. 예년에 비해 많았다. 두 편 이상 응모한 예도 여럿 되었다. 그들의 작품 수준도 모두 어느 선 이상을 유지하고 있어, 이는 그만큼 스스로 창작수련을 쌓고 있는 이들이 많아졌음을 뜻한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가운데서 당선작과 함께 2편의 가작을 뽑을 수 있었음을 기쁘게 여긴다.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점은, 꼭 필요한 경우 외엔 영문 표기를 삼가라는 것이다. 어휘나 문장은 소설 내용을 나타내는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 독특한 맛도 담긴다. 즉 문장 자체를 읽는 재미도 크다는 말이다. 한국어 소설에 아무런 의미도 이유도 없이 영어가 잘못 섞이면, 결과적으로 작품을 훼손시킬 수 있음을 유의해야겠다.
당선작 ‘내 남자의 어머니’(김마리·본보 7월23일자에 전작 게재)는 긴 단편임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팽팽한 구성력과 반전으로 이어지는 결말 등 익숙한 솜씨가 엿보인다. 남편의 출생을 둘러싼 일로 인한 비정상적인 시집살이, 그 탈출구로 미국 생활이 시작되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 즈음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만한 역량이라면, 더러 눈에 띄는 어색한 표현들은 앞으로 충분히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가작 ‘구스타브 쿠르베의 잠’(강송화)은 동성애, 또는 그러한 무드에 스르르 빠져 들어가는 젊은 여성의 심리상태와 감정변화를 잘 그렸다. 자칫 거부감을 주기 쉬운 소재를 무난히 다루었다. 이런 류의 소설은 뛰어난 문장 구사력이 필수인데, 그 점 조금 미흡한 게 아쉽다.
가작 ‘여기는 뉴욕이다’(이영주)는 뉴욕에서 10여 년, ‘똑같은 일상’에 빠져 허덕이는 ‘나’의 모습을 재치 있는 필치로 보이고 있다. 그러한 내용이라 결말이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나, ‘결말’에 이르는 동기가 약해 공감도를 떨어뜨렸다. 한가지, 소설에서 ‘재치’가 지나치면 ‘유치’해지기 쉬운데, 아슬아슬 그 선을 넘지 않은 건 필자의 솜씨다.
그 밖에 ‘십일월의 무지개’, ‘미세스 인디애나’, ‘초록 밴 속의 고독’, ‘반딧불’, ‘마론 인형’, ‘남자 인형’ 등을 흥미 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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