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퍼트 머독이 월스트릿저널을 소유하게 된다면 머독이 바뀔까, 저널이 바뀔까.
뉴욕타임스는 “사람에 의해 신문이 변화되었지 신문에 의해 사람이 변화된 적은 없었다”라는 역사학자 데이빗 나소교수의 말을 인용해가며 저널의 ‘머독化’를 우려한다.
머독과 저널은 도무지 아울리지 않는 한 쌍이다.
저널은 세계가 인정하는 정론지다. 공정한 심층보도와 권위있는 논평으로 신뢰받는 ‘미 언론의 자존심’이다. 뉴욕타임스를 ‘미국을 이끌어간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신문’이라고 깎아내리며 ‘미국을 이끌어가는 리더들의 신문은 월스트릿저널’이라는 세평이 떠돌 정도다.
머독은 정통언론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발행인 중 하나다. 50여개국에 800개에 달하는 기업을 소유한 미디어제국의 황제이지만 아직도 ‘타블로이드 가이’로 불리운다. 섹스, 범죄, 스캔들 등 선정적 내용을 자극적으로 보도하며 신문의 사명은 ‘독자를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상극인 둘의 인연은 머독의 짝사랑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중반 한 파티에서 월스트릿저널의 줄리 샐라먼을 소개받은 머독은 신문사 내부사정에 대해 끊임없이 캐물었다. 그리곤 언젠가는 저널을 소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저질의’ 타블로이드 발행인이 최고의 정론지를 사겠다니, 터무니없어 하던 샐라먼은 차츰 머독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특히 미디어 산업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시각이 인상적이었다. “이자가 정말 그럴 것이라는 묘한 느낌이 들었지요”라고 샐라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
2년전 저널의 모회사인 다우존스의 한 이사가 포춘지 기자에게 “주당 60달러를 준다면 팔거요, 원매자 있으면 보내주시요”라고 한 말이 그대로 기사화된 적이 있었다. 시가는 35달러 안팎, 당장 화제가 되었다. 저널의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노먼 펄스타인은 이렇게 회상한다. “도널드 그레이엄 워싱턴포스트회장은 정신 나가지 않고서야 누가 그런 거래를 하겠느냐고 웃었지요” 머독은 달랐다. ‘60달러라고? 가만있자, 어떻게 성사시킬 수 있을까…’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머독은 마침내 플랜을 완성시켰고 지난 5월초 공표된 그의 50억달러 다우존스 인수제안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사양길에 접어든 신문비즈니스를 거래가의 두배에 달하는 주당 60달러에 사겠다니…그러나 첫 반응은 냉랭했다. 기자들만 반발한 게 아니었다. 100년 넘게 실질적 소유주로 의결권의 64%를 가진 뱅크로프트 일가가 정면 반대를 선언한 것이다.
물밑으로, 물위로 다양한 협상이 진행되며 석달째에 접어든 현재 전망은 한결 밝아졌다. 머독의 꿈, 갈망, 혹은 집념…등으로 표현되는 월스트릿저널의 소유권은 이제 그의 앞에 놓여졌다. 17일 다우존스의 이사회가 인수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음주초 뱅크로프트일가의 최종표결만 남았다. 16명 이사 가운데 13명이 찬성한 압도적 표결이어서 아무리 소유주라도 그 압력을 무시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뱅크로프트 일가가 내세운 가장 큰 반대이유로, 그동안 협상의 발목을 잡아온 편집권 독립의 보장은 외견상으론 해결되었다. 머독의 간섭을 차단시킬 특별위원회 구성 합의다. 편집국장과 주필의 임면권, 경영진과 편집진의 이견 중재권등을 부여한 외부인사 5인위원회를 만들어 편집권 독립 보장을 약속한 것이다.
위원회에 대한 기대는 솔직히 크지 않다. 비슷한 위원회는 머독이 81년 런던타임스를 인수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1년이 채 못돼 편집국장이 날아갔다. 아니, 약속이 틀리지않습니까, 편집진의 항의에 머독은 오히려 반문했다. “그런 약속을 정말 믿었단 말이야?”
요즘 저널 주변에서 유행하는 어구는 ‘Trash or Slash’라고 한다. ‘저질을 감수할 것인가, 감원을 당할 것인가’의 고민이다. 저울질도 한창이다. 협상이 결렬된다면 결과는 필연적이다.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대규모 감원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머독의 저널에 대한 오랜 애정을 감안한다면 저질은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오간다.
경영의 손익계산 쪽에 거는 기대도 힘을 받는다. 50억달러를 투자한 상품의 가치가 무엇인가. 신문의 명성이다. 경영주의 이해관계에 따라 신문의 방향이 비틀리면, 독자의 신뢰가 무너지고. 함께 곤두박질 칠 것이 구독률과 광고수입, 그리고 주가다. ‘탁월한 사업가 머독이 그런 사태를 방관할 리가 없다’라는 시장분석적(?) 기대다.
신문제작에 대한 경영진의 의견은 건전하게 개진되면 관심이 되고, 부당하게 명령하면 간섭이 된다. 관심과 간섭의 수위만 적절히 조절된다면 월스트릿저널의 머독화 역시 미리 편견을 갖고 절망할 일만은 아닌 듯하다.
언론의 본질은커녕, 기업의 시장가치조차 지키지 못하는 경영진도 적지않기 때문이다. 최악의 예로 기록될만한 것이 한국의 시사저널 사태다. 작년 6월 삼성의 인사관련 기사를 사장이 편집국장도 모르게 인쇄소에서 삭제한 이후 전개된 이 사태는 1년간 기자들과 경영진의 대립으로 계속되다가 결국 지난 6월26일 기자들의 전원사퇴로 매듭지어졌다. 정치권력이 물러간 자리에 어느새 안착한 자본권력의 실상을 보여주는 불행한 결말이었다.
박 록 /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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