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작>
빗살무늬토기
한 낮의 달아 오른 태양이
거죽을 팽팽히 당겨
쏟아 내는 무량의 빛살
그 먼 길을 날아오고도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쏟아지는 빛살들
온 대지에 꽂힌다
수백 년 일가를 이룬 마을 앞 느티나무에도
들판에 열을 맞춘 장정 같은 벼 포기에도
어김없이 빛살이 꽂혀
이파리에선 푸른 피톨이 튄다
때로 빛살은 속살까지 파고들기에
가을날 잘 여문 이삭을 벗겨보면
빗살 무늬 잔주름이 무수하다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것들은
쏟아지는 빛살 속에 살아가는데,
한 평생 논두렁 길을 걸어 온 늙은 농부
빛살을 흠뻑 맞은 그 얼굴처럼
잘 구워진 빗살무늬 토기가 되기도 한다
<송호찬>
당선 소감 - 이른 아침에 눈을 뜬다. 벌써 캘리포니아 햇살이 방 안에 가득하다. 어디에나 지천인 햇살. 미국에 오고 난 후 얼마간 시를 쓰지 못했다. 그 많은 변명 거리를 입막음 한 것이 햇살이다. 시 쓰기 시작한 지 여러 해 만에 시 하나를 여물게 한 것도 햇살이다. 그 햇살 아래, 시 한 구절 또 한 구절, 시 한 편 또 한 편, 키워 보리라 마음을 잡아 본다. 시를 알게 해주었고 문학을 함께 나누는 아내에게 감사한다. 시를 살찌워 준 많은 분들과 졸시를 뽑아준 분께도 감사드린다. 영문도 모르는 채 태평양을 함께 건너 온 아이들에게 감사하며, 이곳에서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에게도 감사드린다.
<가작>
111-4 은행나무 길
365번 하향선 동회 앞 정류장에서
첫 번째 왼쪽으로 꺾이는
실뱀처럼 가는 하늘이 얹혀있는 골목 은행나무길
이십년을 훌쩍 뛰어넘은 낯선 번지 111-4
떠나갔던 곳으로부터 돌아와 마주 선 대문
아직 문고리에서 닳고 있는 낯익은 손금
그 체흔體痕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찰칵’
벽들이 화들짝 물러서며
골목은 소란의 급물살로 대문을 밀치고
주인 여자가 고개를 내밀며
“누구세요?” 할 것만 같은 낯선 조급함,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불안에 쫓겨
골목을 빠져 나온다
깜깜한 암실 속
두근거리는 가슴에 시나브로 인화印畵되는 모습
문고리를 잡은 채 바라보시는 아버지
아직 그곳에 계셨다.
이은수
당선 소감 - 2년 전, 17년 만에 한국을 다녀왔다 친구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행선지를 갑자기 틀더니 내가 살던 곳으로 향했다 “야! 네 집이다.” “내 집?” “그래 내 집이였지” 할아버지가 사셨고, 큰 아버지가 사셨고 또 나의 아버지가 그리고 내가 살던 이집에 문득 나는 서있다 그림을 무척 좋아하셨던 아버지와 함께 살던 이집에 낯선 번지수가 붙어 있었다. 지금 나의 스승께서도 그림을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가끔 대화 중에 선뜻선뜻 아버지의 체취를 본다.
<장려상>
등불
사람들이 거리에서 물결무늬가 되어 제 물소리의 행방을 찾고 있는 듯이 뒤엉켜 있습니다. 하교길의 어린이들도 송사리 떼처럼 무리지어 가는데, 지금 이 거리에서는 모두가 한 몸입니다.
저기 늙은 걸인인 듯한 남자 하나가 전 재산 주렁주렁 매달고 쌓아 올린, 가꾸어 온 삶 하나 가득 실은, 수퍼마켓 카트를 밀며 갑니다. 굽은 잔등 위에 걸친 푸대 자락 사이로는 모래바람 푸울 풀 날리면서, 세상 디뎌 온 징검다리 밟듯, 다운타운 건널목을 건너 갑니다. 미처 다 건너가기도 전에 신호등은 빨간색으로 바뀌고, 도시의 정오 위를 질주하던 자동차들은 숨 가쁜 경적을 울려 대는데, 늙은 걸인은 시멘트에 갇힌 듯 다급하게 허둥대기만 할 뿐. 바퀴 뒤틀린 카트는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우뚝 솟은 철근에 묶인 듯, 좌우로 비틀대기만 합니다.
헛된 안간힘 쓰는 모습을 지켜 보다가 모두들 차문 열고 바깥 저수지로 첨벙 뛰어 나올 듯 합니다.
이 때 어린이들 두 세명이 바람처럼 달려와서 묶인 매듭 풀듯이 카트 바퀴를 바로 세우더니, 앞에서 끌어 주고 뒤에서 밀어 주며 어느 새 건널목을 건너갔습니다.
자동차들도 조용히 길게 늘어 선 채, 이 행렬이 부드러운 평지로 사라지듯 다 지나가도록 기다려 주었습니다.
아네모네 하얀 수레 바퀴 따라 길을 건너는 어린이들의 얼굴 위에서 빛나는 불빛을 보았습니다.
이런 작은 등불들이 모여서 도시의 한 쪽을 환하게 밝혀주나 봅니다.
안규복
당선 소감 - 불빛은 어둠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두운 곳을 찾아들어 환하게 밝혀주고 따스한 눈길로 가까이 손 잡아 줍니다. 주위의 풍경을 읽어내는 시선도 층층인데, 그 시선이 시라는 형태를 통해 내 안에서 만들어낸 이미지가 그런 불빛이 되기를 감히 기대하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심사위원님, 미주 한국일보 관계자님들께, 그리고 내 가족과 이웃, 오늘의 내가 있게 해 준 모든 이들에게 어떤 의미로든 감사드립니다.
하늘 물고기
그래 맞아 우리는 자폐아들이지
탄생과 죽음 틈새에 끼어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탄생 전도 죽음 후도 어둠의 광년이 지배하고
발 닿는 곳은 육지든 바다든 지구일뿐이야
위만 뚫린 사각박스에 갇혀 살고 있단 말이지
오래 걸렸다네
하늘에 길을 닦는데
허공에 밑그림을 몇천번 그렸다 지웠는지 아나
은빛물고기
하늘에 도전장을 냈지
격조있는 몸가짐과 절제된 입술은
진화하고 싶다네
물고기의 비늘 하나하나가
수십쌍의 지칠줄 모르는 날개로
어둠을 뚫고
광활하고 찬란한 우주를 겨냥
비상하는 하늘 물고기
얼음보다 투명한 은하수
아가미에 가느다란 파장 일으키니
피묻은 외마디
가슴 붉어지네
정명숙
당선 소감 - 짜라투르스보다 투명한 색채의 향연 10월 3째 주의 베어마운틴 붉게 타오르는 화염 화상 3도로 신음한다. 까뮈의 살인을 유도한 우뇌를 관통하는 햇살은 눈을 멀게 하고 가슴 속에 쏟아지는 상형문자들 말로 글로 표현되기를 거부하는 먼 발치에 정지된 언어 뉴욕생활 30년 박제된 모국어에 긴급수혈 영양주사 아스피린 한 알로 두 다리는 세웠지만 헝크러진 가슴은 아프도록 슬픈 시인이 되고 싶은 미치도록 시인이 되고 싶던 저에게 가능성의 끝자락을 살짝 비춰주시니 가슴 떨립니다.
<심사평>
마종기 - 흔한 소재 깔끔하게 전개
당선작 ‘빛살 무늬 토기’는 혹시나 표절 부분이 없을까 걱정될 정도로 국내외에서 같은 제목의 시를 10편 읽었다. 이렇게 너무 흔한 소재가 문제되기는 하지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잘 소화해낸 깔끔한 전개와 은유 능력이 가상하다. 앞으로 자주 남 앞에 서려면 새로운 소재 발견에도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111-4 은행나무 길’의 애틋한 향수는 그 표현이 신선하다. 그러나 중반부가 산만한 느낌을 주는 것이 결점으로 보였다. 의미의 집중력에 관심을 주면 좋은 시인이 될 것이다. 정확히 같은 충고를 ‘민달팽이의 외길’에도 주고 싶다. 할 말이 몸부림치며 나오지 않으면 침묵하라. 침묵은 시에서도 금이 될 수가 많다. 이 시에서는 끝부분이 진부하고 두서없다.
‘아버지의 눈’과 ‘하늘 물고기’는 너무 좋은 소재를 수필적 안목으로 마무리한 것이 아쉽다. 시는 자초지종이 아니고 가슴 울림이고 전신 감동이다.
한혜영 - 이미지 진부, 다소 산만
단점부터 지적하자면 주제가 애매모호하거나 설명적이라는 점, 이미지가 진부하거나 산만하다는 점, 낡은 소재이거나 상투적인 언어 등등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비교적 단점이 작아 보이는 이은수 님의 ‘111-4 은행나무 길’과 송호찬 님의 ‘빗살무늬 토기’를 남겨두고 최종 논의에 들어갔다.
한 컷의 깔끔한 사진을 보는 듯한 ‘111-4 은행나무 길’은 그러나 그것이 단조로움으로 지적됐고, ‘빗살무늬 토기’는 주제를 떠올리는 힘이 약하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결국은 송호찬 님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또 다른 가작 홍우표 님의 ‘민달팽이의 외길’은 공을 많이 들인 것이 장점일 수도 있지만 자칫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서 시가 경직될 수도 있다는 점에 신경을 쓰면 좋겠다.
장려상으로 따뜻하게 읽혔던 ‘등불’은 설명적인 부분이 너무 많아 군더더기를 없애는 훈련이 필요할 듯싶고, 정명숙 님의 ‘하늘 물고기’는 시적 긴장미가 돋보이기는 하나 들뜬 목소리가 흠이다. 모두에게 축하의 큰 박수를 보낸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