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초 경인에너지 회계과장 시절 크루드 오일 용선계약 도입 결재를 받으러 고 김종휘 한국화약 회장실에 들린 적이 있다. 현재 플라자 호텔이 들어서 있는 당시 북창동 한국화약 본사 건물은 목조 건물로 삐걱 거리는 2층 계단을 올라가 수행비서를 만난 뒤 대기해 회장실에 들어가는데 회장님을 알현하는 법도를 익힌 다음 들여보낸다. 책상 앞 호피 위에서 45도로 인사하고 결재 받은 뒤 머리 숙이고 뒷걸음으로 나오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비지땀이 흘렀다. 요즘 말썽 난 김승연 현 회장의 지나친 보스 기질을 얘기하지만 김종휘 회장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재벌 그룹의 오너가 된다는 것은 보통 수완이나 정치령으로는 어렵다. 고 김종휘 회장의 자형은 김종필 씨 형인 김종락 공화당 재정위원장이었고 이후락 씨가 사돈이다. 그 옛날 과장시절을 회상하면 천안삼거리를 휘저으며 김종락 씨 국회의원 선거운동 한답시고 어줍잖은 짓을 하고 다니던 것이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재벌회사 가신이 된다는 것은 실력만으로는 어림없고 충성심은 물론 탁월한 수완꾼이 아니고는 어림도 없다. 얼굴을 두꺼워야하고 가슴은 냉철해 하나하나 빈틈없이 처신해야 한다. 이런 자질이 부족하면 일찌감치 중소기업으로 가 차라리 인간대접 받는 것이 상책이다.
1970년 봄 미국의 경제학자 케니스 갈브리스를 초청, ‘풍요한 사회와 지식경영인이 주류가 되는 Technocrat’란 주제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Affluent Society’는 1959년 갈브리스 저작인데 개발도상국인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도의 가장 인기 있는 경제서적이었다. 의사, 엔지니어, 변호사, 약사, 회계사 등 전문직뿐 아니라 회사경영인, 중간관리자, 기술자에 스몰 비즈니스 오너까지 Technocrat에 포함시켜 열심히 일만하면 충분한 보수로 얼 마든지 여유자금을 마련해 자본주의의 원천인 Shareholder 가 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오일쇼크 이후 경제 불황으로 정부가 모든 재정을 풀어 고용을 확대하고 성장촉진을 위한 모든 처방을 내렸는데도 오히려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악순환의 경제파탄이 일어나면서 갈브리스를 비롯해 모든 케인즈 학파들이 도태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다행히도 90년대 중반 클린턴 정부 시절 미국 경제는 다시 도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등 전자산업과 인터넷 등 정보산업의 도약으로 최고의 경제성장을 누리며 다시 우리들의 염원인 ‘오너 소사이어티’가 오는구나 하고 기대에 부풀었었다.
그러다 2000년 나스닥의 폭락으로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으며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한 혁신적인 개혁이란 미명 하에 구조조정이 득세하게 됐다. 물론 더러는 효과를 보았지만 한마디로 구조조정이란 노동 근로자와 중간관리자의희생 아래 자본가들이 노리는 있는 자들만 살찌게 하는 구조조정이었다.
경영의 귀재라는 GE의 CEO 잭 웰치는 냉철한 인사관리로 구조조정을 적기에 수행했다는 평을 듣는다. 정보산업의 기술혁신으로 생산인력을 3분의 1 이상 줄였고 중간관리층을 반으로 줄여 컴퓨터로 대체, 생산성뿐만 아니라 이익을 2배 이상 올렸다 해서 연봉에 스탁옵션까지 말단사원 연봉 3만5,000~4만5,000의 400~500배의 보수를 받았다. 주주들이야 많은 배당금에 주가가 70~80% 오를 때 CEO의 특별대우가 별문제 아니겠지만 실은 사원 4만 명을 감축한 희생의 대가였다.
전 회장 웰치가 뽑아놓은 제프리 이멜다는 더욱 강력한 구조조정 등으로 한동안 훌륭한 후계자라고 칭송이 자자하더니 요즘 와서는 GE의 주가가 곤두박질하고 회사 사정이 말이 아니다. 좋은 인재들이 GE를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취약점이고 중산층을 소멸시키는 것은 오너 소사이어티의대주주를 보호하기 위해 중간관리자와 노동인력을 구조조정이란 명분아래 감축하다보니 중산층의 오너 소사이어티는 점점 요원해지는 모순이다.
우리 같은 구시대의 어수룩한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밀려난 사람들이다. 고도의 자본가들인 기득권층이 그들의 이권을 버리고 적당한 양보를 하지 않는 한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양극화는 점점 심해질 것이다.
그래도 우리들은 갈브리스가 던진 풍요한 사회는 기필코 올 것이란 말을 흠모하며 지금은 비록 스몰 비즈니스 오너일망정 먼 훗날 오너 소사이어티의 일원이 도리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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