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버튼의 <빅 피쉬: Big Fish>와 아버지에 대한 단상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아들들의 이야기
1.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을 위하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버지와 자식 사이처럼 복잡하고도 감동적인 드라마가 존재할 수 있을까.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대왕>에서부터 러시아의 대문호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에 이르기까지, 부자 간(父子間)의 이 복잡미묘한 심리극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엔 언제나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른다. 아버지와 꼭 같은 모습을 한 아들, 어린시절과 젊은시절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국화빵 같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엔 사랑과 미움, 그리움과 애착, 눈물과 회한이 짬뽕국물 속의 야채들처럼 온통 뒤섞여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세대 갈등이라든가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전세대에 대한 부정으로 재현되는 이 미묘한 부자간의 심리극은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언제나 ‘전세대와는 다른’ 세상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팀 버튼의 <빅 피쉬>는 바로 이 부자 간의 이야기, 그 끝없는 반목과 화해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팀 버튼(Tim Burton) 감독의 필모그라피는 참으로 독특하다. 그는, <배트맨>(1989, 1992), <가위손>(1990), <슬리피 할로우>(1999) 등의 음울하고 기괴하며 지극히 아름다운 판타지의 세계로부터, <에드우드>(1994), <화성침공>(1996) 등이 보여주는 ‘가벼움’의 미학에 이르기까지 동화(童話)적이고 만화적인 상상력이 넘쳐나는 영상미학을 쭉 선보여 왔다.
<빅 피쉬> 또한 여전히 동화적이며, 기괴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빅 피쉬>는 더욱 특별하다. 왜냐하면, <빅 피쉬>에는 그의 다른 영화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 꼭 하나 있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바로 그것이다.
팀 버튼은 <빅 피쉬>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과 반목, 사랑과 미움을 통해 현실과 꿈,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의 떼어낼 수 없는 인연과 윤회를 그려내고 있다.
2. 살며, 사랑하여야 배울 수 있는 것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파리에서 아내와 함께 귀향한 윌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아버지의 허무맹랑한 무용담을 다시 듣게 된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외판원으로 집 밖으로 떠돌던 아버지. 윌은 그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에 언제나 목말라 했던 것.
가끔씩 집에 들러 지어낸 모험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놓다가 훌쩍 떠나버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어린 윌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한 없는 그리움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과 부정으로 전복된다. 윌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버지를 직접 느끼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윌의 곁에 있어 줄 수가 없었던 것. 윌은 그런 아버지를 허풍쟁이라고 치부하고 무시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병상의 아버지는 아들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황당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마치, 또 하루의 삶을 연장받기 위해 밤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내야 하는 세헤라자드 공주처럼.
아버지는 아들 윌의 삶에 끼어들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 서정주가 시 <자화상>에서 말했던 것처럼, 윌의 아버지를 키운 건 팔 할이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윌의 성장을 가까이서 지켜보지 못했던 아버지가 윌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란 ‘이야기’ 밖에 없지 안겠는가. 윌에게 있어 아버지란 이야기로 현현되며, 윌의 아버지는 바로 ‘이야기’ 그 자체이다.
윌은, 곧 태어날 자신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고, 아버지와 극적으로 화해한다.
3. 나의 아버지를 추억하며
내 아버지는 약주를 하실 적마다 꼭,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를 열창하셨다. 전곡도 아니요. 꼭 그 부분,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라는 부분만을 말이다. 약주를 하신 아버지는 인심도 퍽이나 좋아지셔서, 한 움큼 씩의 지폐를 잠바 주머니에서 손에 잡히는대로 꺼내 우리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시기도 하고, 밤이 새도록 그 ‘이야기’라는 것을 하시기도 했다.
평소 말이 없으시고 은연자중하시던 아버지셨던지라, 우리 형제자매들은 비록 취중언담일지언정 아버지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었던 것같다. 그러나 그것도 곧, 우리 형제자매들이 하나, 둘 대학진학 준비로 바빠지기 시작하자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다. 관객을 잃은 아버지는 재미를 잃으셨던지, 이후로는 달디 단 약주 냄새 솔솔 풍기며 해주시는 아버지의 호쾌한 취중언담을 다시 들을 길이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새보다 가벼이 세상을 뜨셨다.
‘내가 왕년에….’ 혹은 ‘내가 네 나이 때엔….’ 이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의 허풍이 우리 아버지인들 왜 없으셨겠는가. 우리 또한 그칠 줄 모르는 아버지의 취중언담에 짜증을 부리기도 했고, 머리가 굵어진 후에는 허풍 쯤으로 치부하기도 했었다.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아버지의 ‘삶’ 자체와 마주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자신의 아들에게 보잘 것 없는 삶의 진실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약간 과장되었을지언정 아름답고, 허구일지언정 멋진 우리 아버지들의 젊은 시절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강에서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보았고, 마을을 습격한 거인과 친구가 되었고, 환상의 마을에 들어가고,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되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서커스단에서 일하고, 군대를 빨리 제대하기 위해 특수임무를 수행하고, 거기서 하반신 하나에 상반신 둘인 샴쌍둥이를 만나게 되었고, 등등처럼 윌의 아버지만큼 황당무계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세상의 아름다움’과 ‘꿈이 가득한 삶’에 대한 동경을 말한다.
삶이 사실(事實)로만 채워지는 그릇이라 한다면, 이 삶은 얼마나 퍽퍽하고 지겨운 것인가. 엄연한 현실과 반복적인 일상만으로는 가득 메울 수 없는 삶의 그릇에 꿈, 상상, 빛 바랜 기억,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채울 때, 그것은 사람의 소리를 낸다.
생의 허무와 삶의 무게를 조우하기 이전에 꿈과 동경과 이상을 만나게 해주신 아버지에게 나는 이런 말을 꼭 하고 싶다.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모든 것, 커다랗게 구멍난 삶과 처자식 앞에서만 당당했던 그 허세와 당치도 않는 고집과, 그리고 말입니다, 이제는 장아찌처럼 쪼그라든 당신의 작은 등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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