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강남역에 전동차를 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니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안전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탁한 공기와 더불어 답답함을 더해주었다. 급증하는 자살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보였다. 불과 한 세기 전과 비교해보면 한국은 세계가 괄목할만한 경제적인 성과와 물질적인 풍요를 이루었다. 이제 전후세대의 보리고개라는 말은 신세대에게는 더이상 이해하기 힘든 낭만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경제적인 조건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이제 자살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일전에 이곳 지역언론에서도 한국인들의 높은 자살율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우리 사회의 자살은 이제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지만 동시에 무감각한 현상으로 우리 사회에 받아들여진다. 일반인들의 자살은 이제는 언론의 주목조차 받지않을 만큼 흔한 일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왜 자살을 하는가?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 ; 1895-1917)은 그의 유명한 저서 자살론을 통해 개인의 행위를 넘어 자살의 근저에 존재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분석했다. 상이한 통계적 결과의 분석을 통해 그는 자살에는 주목할 만한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발견했다. 뒤르켐의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공동체적이며 반개인주의적인 카톨릭 사회가 상대적으로 낮은 자살율을 보인다는 것이다. 뒤르켐의 실증주의적인 자살에 대한 연구는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지만 그는 사회적 통합과 자살율 사이에 경험적인 상관관계를 끌어내려고 했다.
뒤르켐은 자살의 네 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1) 이기적 자살/Egotistic suicide: 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해서 발생
(2) 이타적 자살/Altruistic: 사회적 유대가 강한 사회에서 발생. 일이 잘못된 경우 집단을 위한 자살
(3) 아노미적 자살/Anomic: 복잡한 사회환경에 적응하기 힘든 개인의 사회적 소외 상태에서 발생
(4) 숙명적 자살/Fatalistic: 노예사회처럼 통제가 심한 집단에서 발생
정리해보면 인간은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와 이에 따른 극심한 좌절감, 기계적인 연대에 의한 지나친 책임의식, 소속감의 부재 등으로 자살을 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살은 개인의 불행은 물론이고 주변에게도 크나큰 상처를 남기는데 그 심각성이 존재한다. 어찌 보면 자살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무기력한 개인이 이 세상에 대항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소극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극단적인 방법일 것이다.
현대사회의 메커니즘은 사람들을 파편화시키며 사람들은 원심력(centrifugal force)에 의해서 작동된다. 결국, 극심한 경쟁원리에 근거한 인간성 부재의 현대사회, 공동체적인 사회적, 종교적 기능의 상실, 극단적인 개인주의는 사람들을 분산, 고립화시켜 개인과 사회의 붕괴와 파멸로 몰고 간다. 쉽지 않지만 급증하는 자살을 막기 위해 우리는 공동체적인 삶의 회복과 커뮤니케이션 네트웍의 활성화,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의 실천 등과 같은 인간주의의 회복이 절실히 요구된다.
오늘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에서 살기가 훨씬 어려웠던 과거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인생의 중요한 의미의 하나는 서로에게 봉사(mutual service)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맹랑하며, 불행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봉사의 마음과 힘이 남아 있다면 자살에 대한 변명은 되지 못한다고 성현들은 갈파한다. 냉정한 위안(cold comfort)이 될 지 모르겠지만 신은 인간에게 극복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느 면에서 인생은 더없이 무의미하다. 삶의 실체를 한꺼풀 벗겨놓고 보면 삶은 그저 일상의 답답하게 반복되는 습관과 덧없고 하잘 것 없는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 이 모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철학, 문학, 종교가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죽음과 삶은 늘 공존한다. 문제는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환상과 마취상태의 분주한 삶의 일상을 뛰어 넘어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철학자 니체는 단언한다. 자살에 대한 상념은 삶의 위안에 대한 위대한 원천이라고 (The thought of suicide is a great source of comfort).... 역설적으로 삶은 죽음과 대비될 때 더욱 의식적으로 맑고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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