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게 흘러가는 시간, 짧은 인생
여름은 식구와 추억 만드는 계절
우리 부부의 침대 머리맡에는 결혼식 사진이 있다. 처음에는 특별한 의미 없이 걸어 놓은 것이었지만 이제 아이들을 다 내어보내는 이때에 그 사진은 우리에게 새로운 감흥을 주곤 한다. 지금부터 20여년 전 앳되고 앳된 아내의 모습과 아직 뱃살도 없고 흰머리도 없는 젊었던 우리의 모습을 볼 때마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직도 마음만은 그 때 그대로인데 처음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한 흰머리에 놀라 열심히 염색을 하던 아내가 워낙 많아진 흰머리에 이제는 염색하러 갈 때마다 쓸데없는 일이 아닐까 하며 한번쯤은 망설여 볼 정도가 된 것이다.
그동안 다섯의 아이를 키우면서 기저귀 갈아 채우랴 목욕해 주랴 옷 갈아입히랴, 단 둘이 호젓하게 여행 한번 못해 보았지만 항상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즐거웠기에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언제나 즐겁고 좋은 것만은 절대로 아닌 것이 어렸을 때 하나가 울기 시작하면 나머지도 다 깨서 울어대는 바람에 한 잠도 못 자고 잠을 설친 적도 많았고 또 아이들이 아파서 괴로워할 때면 차라리 그 병을 우리가 앓게 해달라며 기도드릴 때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 못하는 부모라는 그것 하나 때문에 오히려 기쁨으로 이제껏 키워온 것이다.
어떤 때는 화도 났었고 또 미워도 했었지만 피라는 것이 진해서 자식이 속을 썩일 때면 막 화가 나다가도 그 옛날 나 어렸을 적에 똑같은 행동으로 부모의 마음을 썩였던 나 본인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데는 어찌하랴! 아니 어떤 때는 아이들의 나쁜 버릇이 바로 나 본인의 나쁜 버릇과 똑같은 버릇일 때도 있고 결국 보면 나의 모습을 그대로 빼어 닮아버린 것이기에 야단을 치려다가도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그냥 한숨 한번 내쉬고 돌아설 때도 많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당신 똑 닮았네요” 아니면 “피는 못 속이네요”라고 놀리는 아내의 말에 그냥 웃어버리면서 말이다.
닮은 것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여태껏 아이들을 키우며 확인한 것 중 하나는 애들에게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로 하는 것은 별로 효력이 없고 우리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배워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말로 하라고 한 것은 아닌데 우리가 워낙 해먹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아이들이 모두 부엌에 들어가기를 좋아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방학 때 오면 우리한테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 공항에서부터 읊어대던 것이, 올해부터는 자기네들이 스스로 부엌에 들어가서 집에서 먹던 맛 더하기 나가서 먹어본 맛을 서로 섞어서 신나게 해먹어 대는 것이다.
s전에 아빠의 날에도 우리를 밀어내고는 그야말로 일품요리를 만들어내더니 이번 독립기념일에도 우리를 바깥으로 쫓아내더니 이것저것 멋있게 만들어서 파티를 할 터이니까 엄마 아빠는 저녁에 들어와서 자기네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먹으라는 것이었다. 저녁에 되었다고 해서 들어가 보았더니 한 접시 차려서 내놓는데 나머지는 너무 맛있어서 다 동났고 그것만 남았다는 것이다. 아주 일품이었다. 그것도 특별히 장을 본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듯이 그냥 무엇이든지 냉장고 속에 있는 것을 가지고 만들었는데. 아빠의 날 사놓았던 돼지갈비는 너무나 맛있다고 야단들이였지만 그것은 앨러지 때문에 못 먹어서 모르고 단 소고기 바비큐는 쪼끔 색달랐는데 그것도 우리를 똑 닮은 것이 우리는 무슨 레서피에 구애를 받지 않고 늘 아무거나 눈에 띄는 재료로 실험을 하기 좋아하는데 그 야릇한 쌉쌀한 맛이 마침 메이플 시럽이 상 위에 있어서 설탕대신 시럽을 넣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또 마지막 아이를 졸업시키면서 마지막으로 치른 것이 막내에게서 수표를 받는 일이었다. 필자는 세상 때가 많이 묻었고 욕심도 많아서 돈 문제는 교회에서 자란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있는데 아내는 무엇이 생기면 아주 철저하게 제일 먼저 교회에 드리고 아무리 어려워도 때마다 부모님에게 성의를 보이는데 이것을 보았는지 아이들마다 무엇이라고 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첫째 받은 돈은 전액 교회에, 그리고 두 번째 받는 돈은 전액 부모에게 주는 것이 전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수표 받을 때마다 얼마나 감사하고 보람을 느꼈는지 모르는데 그것도 이제는 막내의 수표를 마지막으로 우리 아이들은 훨훨 자기들의 앞날을 위해 힘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올해부터는 아이들이 다 대학으로 가고 또 아내도 이제는 아이들도 없으니까 본인도 미처 못 마친 공부를 마저 해야겠다고 등록을 하기 때문에 한 집에서 여섯이 다 대학을 다니는 진풍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학비만 해도 이십만달러가 넘게 되었지만 물론 한 푼도 우리 손에서는 나가는 것이 아니고 장학금을 받던지 빚을 얻던지 자기네들이 다 알아서 해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방학이라고 하나도 한가한 것이 아니라 더 북새통인 것이 방학은 해외연수 아니면 학교에 필요한 두둑한 용돈과 학자금을 벌 수 있는 노칠 수 없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아이가 뉴욕에 있는 친구의 생일파티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나 했더니 또 하나는 프랑스 파리로 여름학교를 하러 떠났고 하나는 하버드의 여름학교에 또 둘은 학교 선생님의 누이가 운영하는 회사에 일하며 내년에 쓸 용돈을 열심히 벌고 있고, 이번에 대학 졸업반이 되는 아이는 UCLA 교수 둘과 버클리 교수의 연구보조원으로 일하느라 UCLA 근처로 곧 이사를 나가게 되어있다.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애들이 집에 오면 반갑고 다시 떠나면 더 반갑다고 하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인생은 생각보다 너무나 짧다. 이런 세월도 금방 지날 것이요 또 향후 십년은 어떨까 상상이 가지를 않는다. 그런데 마침 별 다섯짜리 휴양지에 큰 스위트가 두개 있는데 혹시 쓰지 않겠냐는 오퍼가 들어와서 오늘 곁에 있는 식구만이라도 가기로 했다. 또 다른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좋은 여름을 만드세요!
황석근 목사 <마라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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